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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인수      사건이란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 시기였던 1950년대 중반 대한민국 현역 해군 헌병 대위를 사칭한 박인수가

70여명의 여성들과 무분별한 성관계를 가졌던 성추문 사건을 말합니다.

 

박인수는 단 한명의 여성만이 처녀였다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으며

1심에서는 무죄, 2심과 3심에서는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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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서 검사가 '혼인을 빙자한 간음'이라고 주장했으나, 박인수는 이를 부인하였으며,

박인수는 '자신은 결혼을 약속한 적이 없고, 여성들이 스스로 몸을 제공했다.'하면서

그 많은 여대생은 대부분 처녀가 아니었으며 단지 미용사였던 한여성만이 처녀였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런 박인수의 주장은 '순결의 확률이 70분의 1이다'라는 유행어를 낳으며 세상의 큰 관심을 모았었습니다.

 

 

내용에 앞서 "지아코모 카사노바"에 대해 잠깐 알려드리겠습니다.

 

이탈리아인 지아코모 카사노바(1725~1798)는 희대의 바람둥이였습니다.

생전에 사귄 여성이 130여명에 이르렀으며 귀부인, 하녀, 수녀, 천민까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생갈트의 기사(Chevalier de Seingalt)’라는 이름은 그가 자칭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성직자·군인·바이올리니스트 등으로 입신하려 하였으나, 추문(醜聞)으로 투옥되었으며,

1756년 탈옥한 이후부터 생애의 3분의 2를 여행으로 유럽 전토를 편력하였습니다.

 

재치와 폭넓은 교양을 구사하여 외교관·재무관·스파이 등 여러 직업을 갖기도 하고, 감옥에 투옥 당하는 등

그의 삶은 변화무쌍하였습니다.

 

그 동안 여러 계층의 사람들(君侯·귀족·문학가·과학자·예술가·희극배우·귀부인·천민·사기꾼·방탕아)과

두루 사귀었고 계몽주의 사상에도 접하며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는 군인과 성직자를 꿈꾼 바이올리니스트였고, 나중에는 외교관, 복권 창시자, 작가, 탐험가로도 활동한,

시쳇말로 잡기에 능한 ‘뇌섹남’이며 패셔니스트였습니다.

 

 

한국에서도, 댄스 열풍이 전후 사회를 휩쓸 무렵 ‘한국판 카사노바’ 박인수 사건이 터졌습니다.

박씨는 6·25 때 모 대학 3학년에 다니다 해병대에 입대해 헌병대 대위까지 진급했다고 합니다.

 

1954년 4월 어떤 이유로 불명예 제대한 박씨는

해군장교 구락부, 국일관, 낙원장 등 댄스 홀을 무대로 여성들을 농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훤칠한 외모에 대위 신분증을 갖고 다녀 여성들은 쉽게 유혹당했습니다.

여대생, 국회의원과 고위 관료의 딸 등 피해자는 7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카사노바의 엽색 행각은 수십 년에 걸친 것이었지만

이 사건은 1954년 4월부터 1955년 6월까지 겨우 14개월 동안 이뤄졌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사진 캡쳐>

 

 

피해자의 고소로 구속된 박씨는

피해자 70여명 중 미용사 직업을 가진 여성 단 한 명만이 처녀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말은 나중에 ‘여성이 순결할 확률은 70분의1이다’라는 유행어를 낳았으며,

신문들은 ‘센세이셔널리즘’에 빠져 피해자들의 이름과 학교 등 신상을 버젓이 공개했습니다.

 

피해자들의 인권 보호 주장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피고인 박씨와 피해 여성들의 얼굴을 보려고 연일 1만명에 가까운 방청객이 몰려 재판 진행이 어려웠습니다.

 

구름 같은 방청객들을 정리하려고 기마경찰대까지 출동할 지경이었으며,

방청객은 주로 여대생과 주부가 많았고 소설가, 갓 쓴 노인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대부분 재판에 나오기를 거부하고 잠적했으며,

어느 신문은 이 재판을 ‘법정 최대의 쇼’라고 까지 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사진 캡쳐>

 

여론은 박씨보다 무너진 정조 관념을 더 한탄하는 등 여성의 잘못을 더 크게 질책했습니다.

 

피해자 가족들은 

“상제보다 복장이가 더 서러워한다더니 우리는 아무 소리 안 하는데 남들이 왜 떠드는지 모르겠다”며

불쾌해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실상 피해자가 아니라는 뜻이었을까요?

 

 

검찰은 공무원 사칭과 지금은 없어진 ‘혼인빙자간음죄’를 적용해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지만

박인수는 ‘혼빙간’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두 다 여성들이 원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유무죄 논란 속에 1심은 박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는 판사의 논고는 바로 유명해졌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사진 캡쳐>

 

그러나

2심과 3심은 일부 피해자의 ‘혼빙간’을 인정했고 박씨는 징역 1년형을 받았습니다.

 

요즘 같아서는 있을 수도 없는 황당한 재판이지만,

당시는 대한민국 1공화국 시절이었지만, 

그때의 재판부와 언론은 여성의 인권을 어떻게 생각을 했던것인지...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황당한 재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군함도"라 불리는 일본의 섬 "하시마 탄광"

ㆍ 군함같이 생겼다고 불리는 군함도 ㆍ 일본 나가사키현 하시마에 있는 탄광 ㆍ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되어 노동력을 수탈당했던 곳 "군함도"라 불리는 일본의 섬 "하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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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백신 비교

 코로나 백신 비교 화이자 아스트라제네카 모더나 얀센 개발국 미국/독일 영국 미국 미국 플랫폼 mRNA 백신 바이러스벡터 백신 mRNA 백신 바이러스벡터 백신 투여법 / 접종횟수 IM / 2회 IM / 2회 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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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사기꾼 조희팔 사건

ㆍ 수많은 의혹 남긴 채 검·경의 조희팔 수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 ㆍ 피해자만 7만~10만 명 희대의 사기꾼 조희팔이 2004∼2008년까지 전국에 10여 개 다단계 판매 업체를 차리고 의료기기 대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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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의 차이점

 평양냉면 함흥냉면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의 차이를 모르시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그 차이점을 명확하게 파헤쳐드리려고 합니다. 냉면은, 차가울 냉(冷), 밀가루 면(麵) 자를 사용해 이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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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 수많은 의혹 남긴 채 검·경의 조희팔 수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

ㆍ 피해자만 7만~10만 명

 

희대의 사기꾼 조희팔이 2004∼2008년까지 전국에 10여 개 다단계 판매 업체를 차리고

의료기기 대여업으로 30∼40%의 고수익을 보장한다고 속여, 투자자 3만여 명의 돈 4조 원을 가로챈

국내 최대 규모의 유사수신 사기 사건을 말합니다.

 

검경은 조희팔이 2011년 12월 중국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고 결론 지었으나,

이후에도 조희팔 목격담이 이어지는 것은 물론 사망 근거도 빈약해

조희팔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1957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조희팔은

초등학교 졸업 뒤 대구에서 막노동과 도박판 허드렛일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다 한 다단계 업체에 들어가 사기 수법을 익힌 것으로 알려지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사기 행각을 시작하게 된다. 

 

조희팔은 2004∼2008년까지 5년간 전국에 10여 개 다단계 판매(피라미드) 업체를 차리고

의료기기 대여업으로 30∼40%의 고수익을 보장한다고 속여 투자자 3만 여 명의 돈 4조 원을 가로챘다.

 

당시 그는 회원이 가입하면 그 돈을 융통해 먼저 가입한 회원에게 이자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하였다. 그러던 중 사기 행각이 드러나자, 검찰이 기소하기 직전인 2008년 말 중국으로 밀항하였다.

 

 

   검찰 경찰      유착 의혹   

 

조희팔은 2008년 10월 대구지방경찰청 수사과장 권혁우 총경에게 수표를 건넨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조희팔에게 조희팔이 투자하려는 회사에 돈을 대신 전달했다고 진술하였다.

그는 검거될 경우 조희팔 사건을 수사하는 주체가 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전보 조치되었다.

 

조희팔의 밀항에 해경 경찰관과 유착 관계가 있었다는 의혹이 있다.

해경은 이에 대해 감찰을 진행하였다.

2009년 1월 태안해양경찰서장은 그의 밀항을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직위해제되었지만

넉 달만에 복귀하여 2015년 10월 현재 강원지역 해경서장으로 근무중으로 보도됨.


조희팔을 중국에서 만난 대구지방경찰청 소속 정 모 경사가 검거하기는 커녕

골프와 술 접대를 받은 혐의로 2012년 9월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2012년 11월 15일 - 

조희팔로 부터 2억 7천만원 뇌물을 받은 서울고검 김광준(51) 검사(부장검사급)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등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2015년 1월 7일 -

조희팔 측근으로부터 10억 뇌물을 받은 대구지검 서부지청 총무과장(검찰 서기관) 오모(54)씨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등 혐으로 구속기소 되었다.

 

 

중국에서는 가명을 쓰고 조선족으로 신분을 완전히 위조한 뒤 옌타이 인근에 숨어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숨겨 놓은 재산을 송금 받아 황제 도피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2012년 5월 21일 현지 공안이 발급한 사망확인서와 유족이 찍은

장례식 동영상 등을 근거로, “조 씨가 지난해(2011년) 12월 중국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으며,

같은 달 국내로 유골이 화장되어 이송된 사실을 확인하였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조 씨에게 사기당한 피해자들은 그가 경찰 수사를 피하기 위해 위장 사망을 꾸민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경찰청은 2012년 5월 말 조 씨 유족이 국내 모 납골당에 안치한 유골과는 별도로 보관하고 있는 추모용 뼛조각을 입수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DNA검사를 의뢰하였으며,

연구원은 그해 6월 29일 조사 결과 감식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에 경찰의 조희팔 사망 발표 이후에도 조희팔을 봤다는 목격담이 계속되면서

그의 사망을 둘러싼 의혹은 계속돼 왔다.

 

 

   4조원대        희대의 사기꾼 조희팔 사건   

 

최측근 체포 및 검찰의 수사종결, 계속되는 의문

2015년 10월 조희팔의 최측근으로 불리는 강태용이 도피 7년 만에 중국 현지에서 공안에 검거되면서

조희팔 사망 미스터리가 규명될 수 있을지에 대해 관심이 모아졌다.

 

당시 조희팔 사건을 수사한 대구지검은 조희팔의 최측근 강 씨가 2015년 10월 10일 낮 중국 장쑤(江蘇)성

우시(無錫)시의 한 아파트에서 불법 체류 혐의로 중국 공안에 붙잡혔다고 밝혔다.

 

체포된 강 씨는 조 씨가 운영한 업체에서 부회장 직함을 가지고 재무 업무를 총괄한 조 씨의 핵심 측근으로,

검찰은 강 씨에 대한 조사를 통해 조 씨가 사망했다는 조 씨 유족의 주장이 거짓임을 밝혀내겠다며

수사를 진행했다.

 

유족들이 촬영해 공개한 조희팔의 장례식의 투명한 관에 누워있는 남자가 조희팔이라고 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연출된 장례식이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 검찰은 2016년 6월 “조희팔이 중국 산둥(山東)성 웨이하이(威海) 해방군 404의원 응급실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돌연사한 사실을 최종 확인했다.”며

조희팔의 사기 혐의 등에 ‘공소권없음’ 처분하고, 수사를 종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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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대의 사기꾼 조희팔     사망 의혹   

 

2012년 5월 조희팔이 중국에서 2011년 12월 19일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조희팔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밀항했을 당시부터

조선족 조영복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호구를 발급받아 사용하였다.

 

한편, 조희팔의 장례는 유족이 동영상을 촬영하였다.

이에 대한민국 경찰은 화장된 유골의 DNA를 확인하여 사망여부를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경북에 있는 조희팔의 납골묘. 묘에 각인된 날짜와 서류상 사망 날짜가 제각각이다

 

그러나 감식 불가라는 결론을 받았다.

2012년 9월 12일 조희팔을 목격했다는 제보가 나옴에 따라

한국 검찰이 중화인민공화국 공안에 생사확인요청을 했다.

 

2013년 4월 6일 TV조선 박근형의 추적자 9회 방송에서 국내서 조희팔을 목격했다는

제보자의 인터뷰가 보도되었다.

2016년 6월 28일 대한민국 검찰은 조희팔이 2011년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며 공소권없음 처분했다.

 

 

하지만

검찰의 조희팔 사망 결론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근거가 부족해 생사 논란은 계속됐는데,

이는 조희팔의 사망 결론이 가족의 진술에만 의존한 데다가 그들이 제출한 증거와 최근 제보 및

의혹을 확인한 수준에 그쳤기 때문이다.

 

현재 조희팔 사건과 관련된 대표적 피해자 모임 단체로는 전국 49개 센터의 피해자와 가족,

사회 각계 인사 1만여 명으로 구성된 '바른가정경제실천을 위한 시민연대'가 있다.

 

 

 

존 폰 노이만

존 폰 노이만 [ Johann Ludwig von Neumann ] 컴퓨터 중앙처리장치의 내장형 프로그램을 처음 고안한 미국의 수학자, 물리학자. 1949년 에드삭(EDSAC)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컴퓨터를 만들었으며, 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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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폰 노이만 [ Johann Ludwig von Neumann ]

 

컴퓨터 중앙처리장치의 내장형 프로그램을 처음 고안한 미국의 수학자, 물리학자.

1949년 에드삭(EDSAC)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컴퓨터를 만들었으며,

이때 고안한 방식은 오늘날에도 거의 모든 컴퓨터 설계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1903년 12월 28일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대인으로 그의 성 앞에 붙는 폰(von)은 귀족 가문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부유한 은행가의 삼 형제 중 장남이었던 그는

어릴 때부터 수학에 재능이 뛰어나 12세에 프랑스의 수학자 보렐의 함수론을 이해하였으며,

18세에 페케테와 공동으로 다항식에 관한 논문을 독일의 수학잡지에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존 폰 노이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 출신의 미국인 수학자, 물리학자, 화학자, 

컴퓨터 과학자로, 그는 양자 역학, 함수 해석학, 집합론, 위상수학, 컴퓨터 공학, 기하학, 수치해석, 경제학, 

통계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걸쳐 업적을 남겼으며 연산자 이론을 양자 역학에 접목시킨 

최초의 선구자 중 하나였습니다. 

 

맨해튼 계획과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참여하였고 게임 이론과 셀룰러 오토마타의 개념을 공동 개발하였고,

또한 디지털 컴퓨터의 발달에 관여하는 등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1921년 부다페스트대학교 수학과에 입학했을 때에는 이미 일류 수학자로서 인정받았습니다.

1927년 베를린대학교 강사, 1929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 강사를 거쳐

1930년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객원교수가 되었습니다.

1932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가 세워지자 1957년 사망할 때까지 연구소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그의 연구는 수학기초론에서 시작하여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설정 등 수리물리학적 과제를 대상으로 하고, 

또한 수리경제학이나 게임이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였습니다.

 

1937년, 미국 귀화 시민이 되고 나서 그는 당시의 2차세계 대전에 도움을 주기 위해 

중위 시험인 미국 육군의 장교 준비 제도 이사회(USAR)의 간부시험에 지원하였습니다. 

그는 쉽게 시험을 통과하지만, 궁극적으로 그의 나이로 인해 거부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34세였습니다.

 

 

노이만은 1937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나치 독일과의 전쟁은 수치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육군에 자청하지만, 위에 말했다시피 불채용되었으나,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폰 노이만은 폭발물 분야에서 수학적 연구의 전문가가 되고,

미국 해군에 대한 컨설팅 작업을 했습니다.

 

이 분야에서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큰 폭탄에 의한 피해는 폭탄이 지상에 떨어지기 전에 폭발했을 때 더 커질 것"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이론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 폭탄에 이용되었습니다.

 

 

원자 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

나가사키에 투하 된 플루토늄형 원자 폭탄 팻 맨을 위한 폭축렌즈의 개발을 담당했습니다.

 

1940년대에 폭발의 파면 구조에 대한 ZND 이론을 확립하였으며,

이 이론을 바탕으로 10개월에 걸친 수치 해석을 통해 폭약을 32면체에 배치함으로써

원자 폭탄이 실제로 실현할 수 있는 무기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폰 노이만은 미국과의 교전국이던 일본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이었는데,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 지점을 선정할 때 문화재가 많은 도시였던 교토에 대해

"일본 국민들에게 교토가 문화적 가치가 많다면 더더욱 그곳을 섬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폰 노이만이 만든 계획은 폭격기에 원자폭탄을 실은 뒤

교토 상공에 직접 투하해 도쿄 대공습과 같이 도시를 완전히 말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교토에 신혼여행을 갔다왔었던 헨리 스팀슨 국방장관이 반대해 대신 히로시마로 정해졌습니다.

 

 

일생 동안, 폰노이만은 150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순수 수학 60편, 물리학 20편, 응용 수학 60편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컴퓨터와 뇌(The Computer and the Brain)는 사망직전 병원에서 집필되었는데,

집필 도중 그가 사망하면서 미완성의 원고로 남게 되었고 훗날 책 형태로 출판되었습니다.

 

1944년에는 모르겐슈테른과 "게임이론과 경제행동"을 저술하였으며, 기상연구용 컴퓨터 고속도 전자계산기

(MANIAC)의 연구·제작과 수치해석에 기여한 공로로 페르미(Fermi)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 외에 머리(Murray)와 함께 "작용소환론"과 "연속기하"를 창시하였습니다.

 

1942년 8월에 '맨해튼계획'에 참여하여  '컴퓨터 프로그램 내장방식'을 "전자계산기의 이론 설계 서론"에

발표한 후, 1949년 마침내 에드삭(EDSAC; Electronic Delay Storage Automatic Computer)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컴퓨터를 만들었습니다.

 

이때 고안한 방식은 오늘날에도 거의 모든 컴퓨터 설계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순서도와 서브루틴, 몬테카를로법을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그는 어학에도 뛰어나 영어는 물론 독일어와 프랑스어·라틴어·그리스어를 사용하였습니다.

1957년 2월 8일 암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존 노이만      일화   

 

폰 노이만의 학문적 업적 그 자체들은 뛰어나다는 것에 대해 이론의 여지가 없고, 

노이만 본인의 머리가 천재적으로 비상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하기에 서술한 관련된 일화들은 사실이 과장되거나 후대에 와서 지어낸 얘기가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예를 들어 이 문단에 쓰여있던 글들인 "트리니티 핵실험 당시 폰 노이만이 폭발 에너지를 암산으로 가장 

근접하게 맞추어 엔리코 페르미가 칭찬했다"는 것은 외국의 작가가 만들어낸 소설로 실은 

엔리코 페르미가 가장 근접하게 맞혔다고 합니다.

 

노이만 뿐 아니라 대체로 많은 위인들이 그들의 업적과 관련된 일화에서

사실무근인 경우가 허다하니 무조건적으로 믿지는 말고,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릴 때, 부유했던 집에서 파티를 하면 전화번호부를 통째로 외워서 읽어주는 묘기를 하였다.

머리도 비상한 데다가 금수저이기까지 하다 또, 파티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이름, 주소, 전화 번호를 물어보고 집에 갈 때 문 앞에서 한 명씩 인사하면서 저 정보를 다 읊어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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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의 외국어를 모국어같이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발음도 원어민과 흡사하였다.

어릴 때 영어를 배웠지만 미국에 오면서 좀 더 수준을 높이기 위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통째로 외우기도 했다.

 

유진 위그너는 노벨상을 받을 때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존 폰 노이만이란 말을 했다.

기자가 위그너에게 “왜 헝가리에는 그렇게 뛰어난 천재가 많습니까?” 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 위그너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천재가 많다니요?

천재는 오직 존 폰 노이만 한 사람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김나지움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어느 연구 기관이든 동료들은 그의 압도적인 천재성을 인정했다. 

신기하게도 나이를 먹을수록 계산력과 암기력이 좋아졌다고 한다.

 

뛰어난 수학자였던 포여 죄르지는 취리히 대학에 다닐 적 폰 노이만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예전에 그가 있던 클래스에서 강의할 때, 어떤 정리를 소개하고 아직 증명되지 않았으며 

아마 꽤 어려울 거라고 이야기했다. 

폰 노이만은 5분 후 가만히 손을 들더니 칠판에 나와 증명을 바로 써 내려갔다. 

그때부터 나는 폰 노이만을 두려워했다”라는 말을 남겼다. 비슷한 일화로, 

한 교수가 증명되지 않은 정리를 수업에 설명했는데 

수업이 끝나고 폰 노이만이 증명한 종이를 들고 찾아왔다는 기록도 있다.

 

 

동료가 어릴 때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읽은 《두 도시 이야기》를 암송해보라고 하니까

멈추라고 할 때까지 30분 가량 외웠다.

 

동료 물리학자인 에이브러햄 파이스는 맨해튼 계획 후 오펜하이머 사건 때,

존 폰 노이만과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안 좋은 사이를 보며

오펜하이머가 폰 노이만의 재능에 대해 질투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고 서술했다.

 

냉정하게 보자면, 오펜하이머와 폰 노이만의 갈등은 오펜하이머의 일방적인 질투가 아니라

원자폭탄의 실전 투입에 대한 두 사람의 대립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오펜하이머는 원폭의 실전 투입을 반대했고

오히려 폰 노이만이 실전 투입을 주장하는 강경파였다.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던 과학자 및 수학자들은 모두 반강제로 감금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유일하게 폰 노이만만이 너무나 일이 많아 출입이 자유로웠다. 

그가 외출을 했다 돌아오는 때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막힌 부분을 들고 찾아갔고, 

그러면 폰 노이만은 마치 볼링핀을 쳐 넘어뜨리듯 문제를 해결하거나 실마리를 찾았다고 한다.

 

괴팅겐에서 다비트 힐베르트의 초청으로 강의를 하게 된다. 

양자 역학의 형식주의에 힐베르트 공간을 도입한 인물은 힐베르트가 아니라 폰 노이만이다.

 

만악의 근원 폰 노이만은 수학을 논리학으로 귀속시키려는 버트런드 러셀과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시도를 냉소했고, 수학의 한 이론의 무모순성을 증명 체계 속에서 증명하려는 힐베르트의 시도에 역시

회의적이었다.

 

전자의 시도는 다수의 수학자들에게 별 관심을 끌지 못했고

후자의 시도는 쿠르트 괴델의 등장으로 불가능함이 밝혀졌다.

실은 폰 노이만 역시 괴델의 아이디어를 이미 생각해 본 적이 있었으나

힐베르트에 대한 존경심으로 그의 시도를 도왔다고 한다.

 

그래서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했을 때 그 자리에서 바로 이해한 사람도 노이만 한 사람뿐이었다.

정리 직후 노이만이 한 말은 '다 끝장났군요!'였다. 그야말로 정곡을 찌른 표현이다.

 

 

또, 위의 물리학자가 쓴 일화로, 또 다른 뛰어난 수학자 친구가 며칠 동안 밤을 새서 푼 문제를 갖고 

폰 노이만에게 장난을 치려고 문제를 풀었다는 것을 숨긴 채 같이 문제를 풀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폰 노이만이 문제를 순식간에 술술 풀어나가고 동료 수학자가 밤을 새워서 풀었던 

가장 어려운 부분만 남겨놓자 화난 수학자가 답을 말하고 나가 버렸다. 

 

1분 후 폰 노이만은 그가 말한 답이 옳다고 말한 뒤 30분 동안 어떻게 자신보다 빨리 풀었는지 

고민하다가 물리학자가 사실을 이야기해 주자 그제야 웃으면서 밥 먹으러 갔다는 일화도 있다.

 

에이브러햄 파이스는 폰 노이만보다 위대한 인물은 만나 봤지만 

그보다 더 똑똑한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으며 이는 그의 동료들도 동의했다. 

참고로 에이브러햄 파이스는 천재들의 시대에서 유명한 천재란 천재는 다 만나 본 사람이다.

 

폰 노이만이 자문을 해주었던 군사 협력 업체에서 복잡한 계산이 필요해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고민하다가

폰 노이만한테 물어봤는데 그는 '컴퓨터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라며 잠깐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보더니

종이에 몇 줄의 식으로 완벽한 해답을 내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제 밥 먹으러 갑시다' 라고 말했다는

훈훈한 일화도 있다. 

 


누군가 

“200마일 길이의 철로의 양쪽 끝에 서 있는 두 대의 기차가 시속 50마일의 속도로 서로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이때부터 두 기차가 서로 충돌할 때까지 파리가 시속 75마일의 속도로 두 기차 사이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파리가 이동한 거리는 모두 몇 마일일까요?”라는 질문을 폰 노이만에게 했다.

 

폰 노이만은 잠시 생각한뒤 150마일이라고 대답했다.

질문을 한 사람은 실망하면서 “역시 당신은 속임수에 걸리지 않는군요.

 

대개 사람들은 이 문제를 무한급수를 이용해서 풀려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 매우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간단한 논리를 이용해서 파리가 2시간 동안 움직인 거리를 알아내면 금방 풀리죠.

당신은 그렇게 풀어낸 거죠?” 폰 노이만은 대답했다. “아뇨. 무한급수로 풀었는데요.”

 

이 문제는 고등학교 이과 수학의 등비수열 수준의 문제이나 폰 노이만이 무한급수를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머릿속에서 초항부터 계산해서 전부 더했을 가능성도 있다.

 

후에 리처드 파인만도 동일한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파인만은 이미 폰 노이만의 일화를 알고 있었기에 쉬운 풀이로 답을 구해놓고 "무한급수로 풀었는데요?"를

시전하는 능청을 부렸다.  참고로 파인만도 대단한 천재였지만 폰 노이만과 같이 살아있는 컴퓨터처럼

암산을 하는 타입의 천재는 아니었다.

 

 

ICBM(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의 초창기, 개발자들은 완전히 맨땅에서 시작했기에 탄도 미사일이라는 것이

어떤 물건이 될지 개발 과정이 맞는지조차 혼란스러워했다.

 

이 와중에 누군가 '노이만에게 물어보자' 백과사전 노글고 제안했고 개발자들은

몇 개월간 연구한 수천 페이지의 문서를 들고 그에게 찾아갔다.

 

노이만은 그들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겠다고 하였다.

개발자들이 "그럼 얼마 후에 방문하면 될까요?"하고 물어보자 "아, 거기 잠깐만 앉아 보세요."하고 말하며

2시간 동안 자료를 뒤적거리다가 종이와 펜을 들고 설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설명은 완벽했다고 한다.

 

위의 것과 동일한 미사일의 개발 도중, 한 학자가 수백 장의 보고서를 들고 폰 노이만에게 찾아갔다. 

폰 노이만은 보고서를 앞 장을 빠른 속도로 읽고 갑자기 뒤에서부터 대충 몇 장 넘기더니 

"이 구상은 너무 허무맹랑한데요, 사람 손으로는 불가능하고, 신이라도 쉽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고 

곧바로 그 이유에 대해 완벽히 설명해 주었으나, 그 학자는 납득하지 못하고 노이만을 이겨보겠다는 욕심에 

2달이나 더 매진하고는 그제서야 진짜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말년에 폰 노이만은 “현대 수학은 매우 복잡합니다. 

당신은 과연 현대 수학을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노이만은 이 질문에는 그답지 않게 한참을 매우 신중하게 생각했다가 “28퍼센트.”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고작 28%?’라고 의문을 품기 전에 잘 생각해 보자. 대개 ‘알면 알수록 자기가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것이 학문의 길인데, 학자인 폰 노이만이 ‘나는 안다’고 과신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모른다’고 겸손을 떤 것도

아니라 찬찬히 생각한 뒤에 저렇게 구체적인 비율을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은 나는 수학이라는

학문의 100%가 어느 정도인지 윤곽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대답이다.

 

이렇게 너무나 놀라운 재능을 가진 그를 두고 주변 사람은 혹시 그가 악마가 아닐까 의문을 제기했지만 

그 의견은 동료 수학자가 단 한마디로 반박해버렸다. 

“악마가 인간을 연기한 것이라면 그렇게 연기를 못 할 리가 없다.”

 

엔리코 페르미의 부인은 엔리코 페르미의 부인은 “요니(노이만의 애칭.Johnny)는 뒤에서 험담을 듣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언급했다. 사교적, 재능적 면에서 흠을 잡기는커녕 완전무결했기 때문이다.

 

아내와 영화를 볼 때면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나오는 뉴스는 정말 집중해서 봤으나 

막상 영화가 시작하면 자 버렸다고 한다. 

 

그 후 나와서 아내가 영화에 대해 물어보면 봤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즉석으로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한다. 

매우 흥미로운 스토리였지만 영화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책 리만 가설을 보면 폰 노이만은 여자와 스포츠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위인이라고 나온다.
비서의 책상 앞부분을 없애놓고 가끔씩 허리를 숙여 비서의 치마 속을 보는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그것을 눈치챈 비서가 조용히 마분지로 책상 앞을 가려 놓았다고 한다.

 

폰 노이만의 운전 실력은 좋지 않았다. 

그가 차로 나무를 들이받은 뒤 경찰이 오자 "길가의 나무들이 일정한 속도로 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무가 내 앞에 나타났다.(...)" 라고 진술했다.

 

인생의 대부분을 불가지론자 혹은 냉담자로 살았지만,

죽기 직전 암으로 투병 중에 가톨릭에 귀의하여 가톨릭 신자로서 생을 마감했다.

주변 인물들에 따르면 이러한 개종은 평소 건강할 때의 발언이나 태도와는 사뭇 동떨어진 일이었다고 한다.

 

그의 병자성사를 집전한 신부에 따르면, 그 자신은 개종으로 그다지 큰 위안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미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노이만은 가톨릭에 귀의하면서

파스칼의 내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가 암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의 동생이 파우스트 독일어 원문을 읽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생이 읽다가 잠시 멈췄을 때, 폰 노이만이 다음 구절들을 읊었다고 한다. 

이것이 그의 기억력에 관련된 마지막 일화이다.

 

기술적 특이점에 대해 최초로 언급한 사람도 폰 노이만이다. 

정확히는 동료였던 스타니스와프 울람(Stanisław Marcin Ulam)이 1958년 폰 노이만의 사후에 

그에 대해 회고하며 쓴 글에서 언급되었는데 "기술의 항구한 가속적 발전으로 인해 인류 역사에는 

필연적으로 특이점이 발생할 것이며,

그 후의 인간사는 지금껏 이어져온 것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별명 중에 반신(半神, Demigod)이 있다.

두뇌가 인간의 영역이 아니란 소리. 프린스턴 대학에서 떠도는 농담 중 "폰 노이만은 인간이 아니고,

인간에 대한 세밀한 연구를 하고 완벽히 모방할 수 있는 반신이다."가 있다고 한다.

 

노이만은 디지털 컴퓨터의 개발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지만 컴퓨터는 늘 거대해야 하고,

핵무기를 만들고, 기후를 통제하는 데에만 유용하다고 여겼다.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했던 건지 모든 곳에 컴퓨터가 내장될 미래는 예상하지 못했다.

 

후덕한 몸매 때문에 그의 아내가 "이런 수학천재도 칼로리는 계산하지 못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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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Steve Jobs, 1955.2.24~2011.10.5]

 

스티브 잡스는 미국의 기업가이며 애플 사(社)의 창업자이다.

매킨토시 컴퓨터를 선보이고 성공을 거두었지만, 회사 내부 사정으로 애플을 떠나고 넥스트 사(社)를 세웠다.

그러나 애플이 넥스트스텝을 인수하면서 경영 컨설턴트로 복귀했다.

애플 CEO로 활동하며 아이폰, 아이패드를 출시, IT 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스티브 잡스 [ Steve Jobs ]     생애   

 

1955년 2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 마자 양부모 폴과 클라라에게 입양되었다. 양부모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미국서부의 농부였다.

 

그의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군인이 되었으며

캘리포니아 주 해안경비대에 들어가 경비정 기관사로 근무했었다.

 

전역 후 클라라와 결혼하였고 자동차 정비, 할부금 수금원 등의 직업을 가졌고

아이가 없자 스티브 잡스를 입양하였다.

 

잡스는 성인이 되어서 작가로 활동하는 모나 심프슨(Mona Simpson)이라는 여동생과

대화 치료사였던 어머니와 정치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존재도 알게되었다.

하지만 그는 친부모에 대해 냉담하게 반응하며, 언제나 양부모를 친부모로 여겼다.

 

스티브 잡스가 3살 되던해 그의 가족은 아버지의 직장(자동차 영업, 부동산 중계)을 따라 사우스 샌프란시스코의

산업단지에 들어선 주택가로 이주하였고 주변 전자회사에 다니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성장하였다.

 

이때 전자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동년배 빌 페르난데스, 5살이 많았던 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을 만나

교류했으며 스티브 잡스에게는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모두 학교에서는 낙제생이자 독선적인 

성격을 가진 외톨이였지만 전자적인 지식과 집념 그리고 유쾌한 성격은 비슷했다.

 

이당시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고

당시 미국 히피문화에 흠뻑 젖어있었다고 회고하였다.

홈스테드고등학교를 마친 뒤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있는 리드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마약을 중단하고 새로운 이상을 찾아 동양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1년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가 아타리(Atari)라는 전자게임 회사에 취업하였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고 스티브 잡스는 히피차림으로 인도로 여행을 떠났다.

수개월간 인도 북부 히말라야 일대를 여행하였지만

그가 기대했던 내면의 정신적인 만족감을 얻지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가 아타리사에 복직하였다.

 

그는 컴퓨터 게임을 만들었으며 이때 다시 워즈니악과 친분을 쌓았고

전자분야의 지식이 해박했던 그의 도움을 받았다.

 

사업적인 수완과 마케팅 감각이 뛰어난 스티브 잡스는

천부적인 전자 엔지니어였던 워즈니악의 도움이 있어야만 그의 아이디어가 실현 가능했고

각각의 장점을 합쳐 두사람은 1976년 컴퓨터(회로기판)를 제조하는 회사를 공동창업을 하였다.

 

회사 이름인 애플(Apple)에 대해서는 스티브 잡스가 컴퓨터를 만들 때,

사과를 한입 베어물고 컴퓨터 위에 올려놓았던 것을 상징화한 것이라는 설,

사과가 좋은 의미(성취, 지적 호기심, 건강)를 담고 있어 지었다는 설, IBM이 '썩은 사과'를 신문 광고에 내고

애플을 비꼬자 다음날 애플이 '썩은 곳이 도려내진 사과'를 신문에 내어 응수한 사건 때문에

자사 로고까지 바꾸었다는 설 등이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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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스티브 잡스가 죽은 뒤 공동 창업자인 워즈니악은 ‘스티브 잡스가 오리건 주의 선불교 수행을 하던

장소였던 사과농장을 연상하여 애플(Apple)이라고 지었다’고 밝힌 바 있다.

 

회로기판만 있는 퍼스널컴퓨터 '애플Ⅰ'을 만들어 발표했으며,

당시 퍼스널컴퓨터 시장이 주목받게 되자 곧 새로운 컴퓨터 플랫폼인 애플Ⅱ를 만들어 냈다.

 

확장슬롯으로 기능을 향상시킬 수 있었고

획기적인 운영체계를 적용하여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불편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영세한 업체로서는 사업여건이 불리했다.

스티브는 이런 환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비전을 열정적으로 설득해나갔다.

마침내 그들이 만든 퍼스널컴퓨터는 시장에서 큰 반응을 보이며 판매에 성공했고

그에 힘입어 1980년에는 주식을 공개했다.

그는 억만장자가 되었으며 미국에서 최고 부자 대열에 합류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연인관계였던 크리스 앤과 사이에서 리사(Lisa)라는 딸을 두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친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친자확인 소송에서 패소한 이후 리사가 친자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잡스의 딸 리사 브레넌 잡스. 1978년생이며, 하버드대학 재학 시절 교내 신문에 투고한 것을 시작으로 다수의 신문, 잡지에 글을 쓰는 문필가로 활동중이다. 2018년에 아버지 잡스와의 쉽지 않았던 삶 이야기를 다룬 'Small Fry'라는 자서전을 써서 냈다.

 

또한 그는 모순된 성격과 인색함으로 어려운 시기에 힘이 되었던 친구들에게서 외면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태도와 생각을 바꾸지 않았고 이상적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더욱 집중했다.

 

회사내에서는 매킨토시와 리사 컴퓨터를 개발하면서

애플사의 핵심 엔지니어와 경영진 사이에 반목이 심해졌고, 스티브 잡스는 이런 불화를 조화롭게 리드하지 못했다.

 

스티브 잡스 자신이 주도했던 리사 프로젝트에서 밀려나자

새로운 컴퓨터를 개발하는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그를 믿고 따랐던 매킨토시 프로젝트 담당 엔지니어들은 노력에 비해 형편없는 연봉을 받고 있다는

불만이 고조되었고 스티브 잡스에 대한 배신감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84년에는 IBM에 대항하여 매킨토시 컴퓨터를 선보이고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회사 내부에서는 실패한 리사 프로젝트팀과 파워게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메킨토시 발표 후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맥(Mac)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판매는 급속하게 줄었다.

 

스티브 잡스의 독특한 스타일과 분위기와 함께 매킨토시에 매료되었던 사람들은

이제 불편함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1985년 1월 19일 워즈니악과 함께 백악관에 초빙되어 레이건 대통령이 수여하는 국가기술훈장을 받았지만

워즈니악은 회사를 떠나고 말았다. 마침내 스티브는 현실성없는 망상가이자 회사를 도탄에 빠뜨린 인사로

지목되어 1985년 5월 경영 일선에서 쫓겨났다.

 

애플을 떠난 뒤 넥스트(NeXT)社를 세워 세계최초의 객체지향 운영체제인 넥스트스텝(NeXTStep)을 개발하였고

1986년에는 조지 루카스 감독으로부터 픽사(Pixar)를 1000만 달러에 인수하였다.

 

차세대 운영체제를 갖춘 그래픽 전용 컴퓨터를 개발하여 의료업계에 판매하려고 시도했으나

두 회사 모두 수익을 내지 못하고 스티브 잡스를 위기로 몰았다.

 

그러나 픽사를 담당했던 엔지니어와 그래픽 아티스트들은 

하드웨어 사업을 포기하고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것을 잡스에게 제안했다.

 

잡스는 이에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픽사는 애니메이션 영화로 회생의 기미를 보이기도 하였다.

 

1991년 3월 18일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로렌 파월이라는 여성과 결혼했으며 3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는 결혼과 자녀를 양육하는 문제를 두고서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과 확신을 가지지 못했지만

예전의 모습과는 확연하게 변해있었다.

 

가정은 행복했지만 그의 사업은 점점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미국의 거부 로스 페로와 일본 캐논(Canon)사를 통해 투자를 받으며 겨우 버텨나가고 있었고

회생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픽사의 존 레스터가 감독한 '토이스토리(Toy story)'의 원형이 되는 '틴토이(Tin Toy)'를 만들어

아카데미상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며 세간의 관심을 받게되었다.

하지만 아직 큰 돈을 벌지는 못했기 때문에 이때까지 잡스는 픽사를 인수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1996년 적자에 허덕이며 새로운 운영체계를 원했던 애플이 넥스트 사(社)를 인수하면서

스티브 잡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3년만에 다시 애플로 복귀하였고 경영 컨설턴트로 역할하며 4억달러 흑자를 내는 데 공을 세웠다.

또한 쓸모없는 회사로 생각했던 픽사는 존 래스터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의 대대적인 성공에

맞추어 주식시장에 상장하여 거의 빈털털이에 내몰렸던 스티브 잡스를 단번에 억만장자에 올려놓았다.

2006년에 월트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하면서 잡스는 월트 디즈니의 이사회 임원이 되었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CEO로 복귀한 2년 동안 애플은 자본이 20억 달러에서 160억 달러로 증가했으며

픽사는 연이은 흥행 성공으로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성공한 영화사로 기록되고 있었다.

 

한층 여유로워진 스티브 잡스는 새로운 미디어인 인터넷과 접목한 새로운 제품 개발에 눈을 돌렸으며

그 대상은 음악이었다.

 

그는 항상 제품에서 모양과 색깔 등의 디자인 결정을 매우 중요시 여겼다.

아이튠즈 개발에 이어 아이팟라는 MP3플레이어를 개발하여 세계적인 히트상품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이제 사업가에서 세상을 바꾸는 인물로 인지되고 있었다.

많은 청중들 앞에서 청바지에 검은색 셔츠로 연설하는 그의 모습은 바뀌어가는 세상의 서막을 알리는 행사로

각인되었고 사람들은 그가 만든 제품에 열광했다.

 

2007년 맥월드에서 아이폰이 발표되고 전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애플은 약 500억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특히 아이폰은 통신업계 전반을 뒤흔들어 놓았고 문화적인 파급 효과도 지대했다.

또한 2010년 발표된 아이패드라는 태블릿 컴퓨터를 발표하면서 스티브 잡스가 주도하는 변화는 가속화 되었다.

 

스티브 잡스는 IT업계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되며 성공가도를 달렸으나,

개인적으로는 희귀암 발병 등 건강 문제에 시달렸다. 2004년 췌장암으로 수술을 받고,

2009년 간(肝) 이식 치료를 받았다.

 

2011년 8월 24일 병세 악화로 애플 CEO직을 사임했고,

사임 후 2달이 채 지나지 않은 10월 5일에 향년 56세로 사망했다.

사인(死因)은 췌장 신경내분비종양이었다.

 

 

 

   스티브 잡스 [ Steve Jobs ]      경영철학   

 

프레젠테이션의 귀재로 유명하다.

새로운 제품을 시장에 소개하는데에 아주 간결하면서도 효과적인 발표방식을 쓰면서

많은 발표자들의 귀감이 되고있다. 스티브 잡스의 경영 철학은 다음과 같다.

 

1.  경영은 기존 질서와 철저히 다르게.

 

2.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정해 직접 몸으로 뛰어라.

 

3.  항상 새로운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포기하지 마라.

 

4.  기술력을 과신하기보다 소비자 눈높이에 맞춰라.

 

5.  간단하고 단순하게 하라.

 

 

 

   스티브 잡스 [ Steve Jobs ]      어록   

 

Stay hungry, Stay foolish
항상 갈망하라, 항상 우직하게.

 

"One more thing..."
한가지만 더...

 

"포커스 그룹(Focus Group)을 통해서 제품을 디자인하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다. 사람들은 직접 물건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만큼 미친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다."

 

혁신은 리더와 추종자를 구분하는 잣대다.

 

창의성이란 단지 어떤 것들을 서로 잇는 것일 뿐이다. 당신이 창의적인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 일을 해냈냐 묻는다면 그들은 아마 조금 죄책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사실 정말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무언가를 보았을 뿐이고 그것은 얼마 후 그들에게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훌륭한 아티스트는 베끼고 위대한 아티스트는 훔친다.(Good Artists Copy, Great Artists Steal)

 

컴퓨터 시장 내에서 Apple의 점유율은 BMW메르세데스-벤츠, 포르셰가 자동차 시장 내에서 차지하는 점유율보다도 더 높다. BMW나 벤츠가 되려고 하는 것이 뭐가 잘못된 건가?

 

나는 지금껏 Apple이 이쪽(컴퓨터) 업계의 소니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오곤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Apple은 이 업계의 Apple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매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의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 [ Steve Jobs ]      전해지는 이야기   


•  잡스의 성은 원래 /dʒɒbz/로 발음된다.

원래 외래어 표기법을 정석대로 따른다면 좁즈가 되겠으나,

아무래도 잡스가 미국인이라 본인이 사용하던 미국식 영어에서 저 ɒ 부분을 용인발음보다 더 큰

개구도로 발음했던 점도 있고, 뒤의 s가 유성음임에도 불구하고 언론 및 언중이 '잡스'라는 표기를

자주 사용하다 보니 해당 표기가 공식 표기가 되었다.

언론 보도나 서적 등에서 영어권 인명을 한국어로 표기할 때,

뒤에 오는 s의 처리는 원어와 동떨어지거나 중구난방인 경우가 많다.

 

 

•  종교는 선불교로 리드 대학교 철학과를 한 학기만 다니고 중퇴한 후,

사과 농장에서 히피 공동체 생활을 하다가 일본 선불교 승려인 오토가와 고분 치노를 만나 선불교에 입문했다.

 

 

•  왼손잡이다. 다만 수기는 오른손으로 썼다.

스티브 잡스의 대표적인 이미지인 손으로 턱을 쥐고 있는 사진도 잘 보면 왼손을 쓰고 있다.

 

 

•밥 딜런의 광팬이었고 그를 매우 존경했다.

딜런이 녹음한 773곡 전곡이 담긴 디지털 패키지 세트를 iTunes Store에서 판매하기로 했는데

상품의 출시를 알리면서 잡스는 "밥 딜런은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시인이자 뮤지션이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제 영웅이기도 하다"고 소개했다.

Apple 초창기 잡스는 100시간 분량이 넘는 1960년대 딜런 음악 해적판을 수집했다.

월터 아이작슨이 저술한 잡스 전기에 따르면 그와 Apple 초기의 스티브 워즈니악은 딜런 팬으로서 마음이 맞았다.

 

“딜런의 노래책을 구입해 가사를 해석하느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고 워즈니악은 말했다.

“딜런의 가사들은 창조적 사고를 불러내는 주문이었다.”

그 뒤 잡스는 1984년 Macintosh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밥 딜런의 곡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4년 마침내 딜런과 상봉했다.

잡스의 전기에 따르면 두 사람은 “딜런의 방 앞쪽 테라스에 앉아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잡스는 긴장했지만 그의 우상은 “내가 바라던 그대로였다. 정말로 허심탄회하고 솔직했다.”

 

잡스가 기억하는 한,

그가 너무 긴장해서 말이 잘 안 나온 적은 오직 밥 딜런을 만났을 때(2004년 10월)뿐이었다'는 대목도 있다.

 

 

 

•  마이클 잭슨의 노래 Billie Jean을 즐겨 들었다고 한다.

일을 하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기분이 안 좋을 때 Billie Jean을 들었다는 후문이 있다.

 

 

•  비틀즈의 광팬이기도 했다.

iTunes는 현재도 유일하게 전세계에서 비틀즈의 모든 곡을 감상할 수 있는 음원서비스가 되었다.

이는 Apple과 동명의 회사였던 애플 레코드와의 분쟁 때문인데,

2004년 즈음 Apple의 엄청난 자금력을 바탕으로 복잡하게 꼬인 저작권을 모두 인수하였다.

 

이후 2016년이 되어서야 기타 음원사이트에 비틀즈의 곡이 서비스 되고 있다.

그의 아이폰에는 존 레논의 명곡인 Strawberry Fields Forever가 10개가 넘는 버전이 담겨져있었다고 한다.

 

 

•  워즈니악의 증언으로는 아인 랜드의 움츠린 아틀라스를 좋아했다고 한다.

 

 

•  반전 가수로 유명한 조안 바에즈와 잠시 사귄적이 있었는데 잡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때문에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고 나중엔 그냥 친구로 남았다. 조안 바에즈가 나중에 술회하기를 잡스가

자신과 사귀었던 이유는 그냥 단순히 밥 딜런의 광팬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  비건 채식주의자였고, 견과류와 물만 먹었다고 한다.

로렌과 결혼하기 전에는 떨어진 과일만 먹는 극단적 채식주의자였다가 결혼할 때쯤 비건으로 전향했다.

 

물론 그도 사람인지라 건강이 좋지 않았을 때에는 의사 권유에 따라 잡식을 했다.

채식주의자였지만 가족과의 일본 여행 때 장어 초밥만큼은 너무도 좋아했다고 한다.

훗날 영화 <잡스>에서 잡스 역을 맡은 애슈턴 커처도 영화 촬영 당시 메소드 연기를 위해

물과 견과류만 먹다가 췌장에 이상이 생겨 응급실에 호송되었었다. 

 

 

•  펩시의 전 CEO였던 존 스컬리를 Apple의 CEO로 영입할 때의 일화가 꽤 전설적인데,

"(몸에 안좋은) 설탕물이나 파는 거 그만하고 나랑 같이 세상을 바꿔보고 싶지 않습니까?"라고 설득시켰다고 한다.

 

훗날 스컬리는 잡스를 내쫒아버리는 일을 한다.[34] 그리고 스컬리는 훗날의 iPhone과 iPad의 직계 조상인

Newton MessagePad를 만들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잡스의 말대로 되었다. 

 

 

•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곤 하지만, 이 사람은 '사업가'지 절대 '개발자'가 아니다.

물론 IT분야를 제대로 이해하는 유능한 경영자임은 사실인데 위의 FBI 보고서에는

'그런데 기술 부분에서는 좀 거시기...'라는 평가도 있었다고...

 

그러나 그가 이룬 업적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명문대학도 아니고 그저 대학중퇴자에 입양아,

문제아였던 그가 21세기 IT 산업의 아이콘이 되었다는 그의 삶 자체만으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희망을 준다.

그래서 잡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워즈니악이 없었다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인물이란 얘기를 자주 한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다.

 

 

 

•  애초에 그는 조지 루카스로부터 픽사를 인수할 생각이 없었으나

픽사의 인수는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픽사의 IPO로 인해 가사회생했고, 직원을 다루는 방식을 변화시키며

한 회사의 CEO로서 성장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후 픽사가 디즈니에 인수되면서 잡스는 디즈니의 최대주주가 되었었다.

사후 그의 유산은 부인이 상속했으나 로렌 파월 잡스는 지분을 일부 정리하고

2019년 기준 디즈니의 5대 주주가 되었다고 한다.

 

 

•  Apple의 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켄 시걸은 잡스가 1997년 회사에 다시 복귀했을  당시를 떠올렸는데

잡스는 한 미팅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데스크탑 전쟁은 끝났다.

 

우리는 (Microsoft에) 패배했다.'고 말했다 한다.

그 말은 더 이상 회사가 Microsoft를 이기는 것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Apple다움'을 다시 이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잡스는 Apple을 BMW에 비교하기도 했는데

BMW의 경우 전체 자동차 시장 점유율로만 따지면 5% 남짓의 소규모 브랜드이지만

여전히 세계적으로 가장 훌륭한 브랜드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것처럼 Apple 역시 양보다는

퀄리티와 혁신에 더 집중하는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잡스는 인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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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Che Guevara, Ernesto Guevara de la Serna)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 대학에 다니던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친구와 함께 오토바이 여행을 하던 중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과 고통을 체험하게 되자,

이들을 돕기로 결심하고 1956년 쿠바 반정부 혁명군에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부상병을 치료하는 의사였지만 곧 전투에 참가하였고, 그는 이 전투에서 크게 활약합니다.

 

쿠바의 초대 산업부 장관

체 게바라 (Che Guevara, Ernesto Guevara de la Serna)
이름 Ernesto "Che" Guevara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출생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
신체 175Cm
사망 1967년 10월 9일, 볼리비아
학력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의학과
국적 아르헨티나 / 쿠바
정당 쿠바 공산당
볼리비아 공산당
경력 쿠바 국립은행 총재
쿠바 산업부 장관
서명

 

혁명이 성공하며 쿠바 국민들의 지지를 받게 된 체 게바라는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국립 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 등 쿠바의 핵심 지도층이 됩니다.

 

쿠바 대혁명 6년 후,

그는 집권자 카스트로의 다음가는 지위를 가졌음에도 콩고, 볼리비아 등의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쿠바를 떠납니다.

 

그리고 1967년 볼리비아에서 게릴라군을 조직하여 싸우다 정부군에 체포되어 죽음을 맞이합니다.

체 게바라는 <쿠바에서의 인간과 사회주의>, <게릴라전> 같은 저서를 남겼으며,

이상적인 사회를 향해 열정을 바쳤던 그의 모습은 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유년시절의 체 게바라

 

유년기

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산타 페 주 로사리오의 귀족가 혈통을 이어받은 부르주아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제법 큰 병원 원장이었으며 따라서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잘 자랐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둘 다 중립적 자유주의자라

어릴적부터 스페인 내전 패배로 망명한 공화국 정부 인물들과 만나 진보적인 사고에 대한 지각을 넓혔습니다.

클수록 가정에 헌신적이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커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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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에 의하면 어린 시절 에밀리오 살가리(1862~1911)[6]의 소설들에 빠져 살았는데

이 소설들에서 반제국주의적 사고관을 배우게 되었다고 적혀있으며, 사색과 독서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체 게바라는 미숙아로 태어났습니다.

두 살이었을 때는 아버지의 팔에 안긴 채 차가운 여울을 건너다 천식에 걸려 평생 흡입기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학창시절 럭비를 즐겨 하는 만능 스포츠맨이었고, 시가를 즐겨 피웠습니다.

 

 

게릴라들과 함께 있는 체 게바라(맨 오른쪽)

 

전사 그리스도 혹은 20세기 가장 완전한 남자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인 사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극찬했습니다.

 

1928년에 태어나 1967년에 39세로 죽은 체게바라는 살아 있었을 때도 쿠바와 남미에서는 유명한 인물이었지만,

사후 그가 생존 했던 기간보다 더 오랜 기간,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많이 유명해진 인물입니다.

 

그는 프랑스 ‘68운동’ 당시 영웅으로 추대받았고,

이후 4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양한 측면에서 재조명되고 소비되고 있습니다.

 

특히 그가 보여준 현실의 안락과 권력에 안주하지 않고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죽어간 삶의 궤적은

이후 진보적인 젊은이들이 그를 멘토로 삼기에 주저치 않게 하였고

그의 참혹한 죽음은 ‘전사 그리스도’ 란 별명을 붙이게까지 했습니다.

 

이런 인기 때문일까?

체 게바라는 혁명의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그가 가장 경계했던 자본주의의 최첨단에 있는 미국에서조차

가장 뜨겁게 인기있는 인물로 소비되고 있습니다.

 

 

 

‘혁명도 사회주의도 사라진 지금 오로지 체 게바라만 살아 남았다’고 할 정도로

체 게바라는 이념과 국가를 떠나 전설의 혁명가로 살아 남아 있습니다.

 

알베르토 코르다가 찍은 그의 얼굴 사진은

붉은 티셔츠에 프린팅되어 반항기 어린 10대와 20대의 가슴팍을 장식하고, 그의 이름이 들어간 시계,

심지어 맥주까지 나오면서 ‘체 게바라’라는 이름은 이제 남미의 혁명가가 아니라,

젊은이라면 한번쯤 눈 돌려 관심을 가져보고 싶은 하나의 아이콘 쯤으로 소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살아있었던 인물 자체보다도 하나의 상징으로 남아 버린 체 게바라이지만

그 상징이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이토록 사랑을 받게 된 데에는

인간 체 게바라의 삶 자체가 가진 준엄함과 숭고함이 있었기 때문인 것도 사실입니다.

 

20세기 초 남미 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체 게바라는 안락한 지위를 버렸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 앞에 누구보다 순정했으며, 이를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가장 엄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독서를 하고 있는 체 게바라

 

아르헨티나 여행을 좋아하는 청년 의사

체 게바라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입니다.

체 게바라란 이름에서 체(che)는 스페인어로 사람을 부를 때 쓰는 ‘어이’ ‘이봐’ 정도의 의미를 지난 말로

체 게바라가 혁명에 뛰어들면서 스스로 이름을 이렇게 고쳤다고 합니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중상류층 백인 가정 출신이다.

1930년대 아르헨티나는 세계 경제순위 7위를 할 정도로 부유한 나라였고 남미에서 가장 잘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 풍요는 아르헨티나의 백인 상류층들이 구가하는 것이었고

대부분의 남미 민중들과 비슷하게 아르헨티나의 노동자와 농민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체 게바라의 양친은 바스크와 아일랜드계의 백인으로

남미 대부분의 국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톨릭을 믿고 있는데 반해 그의 어머니는 무신론자였다고 합니다.

 

 

체 게바라(왼쪽)과 피델 카스트로(오른쪽)

 

피델 카스트로와의 만남 그리고 쿠바 혁명전쟁

과테말라의 아르마스 독재정권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된 체 게바라는

일다 가데아와 함께 멕시코로 망명하였습니다.

 

1955년 체 게바라는 일다 가데아의 소개로 쿠바의 망명 정치가인 피델 카스트로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

당시 피델 카스트로는 1952년 쿠바의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가 바티스타의 쿠데타로 선거가 무산된 뒤

바티스타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체포, 2년간 복역 후 특사로 풀려나 멕시코로 망명한 상태였습니다.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를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아는 강인하면서도 온화한 새로운 지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해방 운동에 동참했으며,

처음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의 비밀 결사대에 군의관 자격으로 참여하였지만,

점차 그의 인품과 지도력으로 인해 그 영향력이 커져갔습니다.

 

1956년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86명의 동지들과 휴양용 요트를 개조한 배에 올라타 멕시코에서 쿠바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좋지 않은 기상상태와 이들의 상륙을 간파한 바티스타정권의 공격으로 산 사람은 12명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은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에 들어가 이때부터 게릴라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산간지역을 전전했지만 곧, 쿠바 내 반정부세력과 손을 잡으면서 게랄라의 세력은 급성장하였습니다.

이 반군 게릴라 활동 중 체 게바라가 보여준 능력과 인간미는

그를 피델 카스트로에 이은 반군의 2인자로까지 끌어 올렸습니다.

 

 

동지들과 함께 행진하는 체 게바라

 

체 게바라는 1958년 연말, 자신이 지휘하는 제 2군을 이끌고 쿠바의 산타클라라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많은 쿠바의 민중들이 체 게바라의 군대에 동조하였고 이 승리로 반군은 수도 아바나로 가는 길을 얻었습니다.

 

마침내 1959년 1월 1일 독재자 바티스타가 도미니카로 망명하면서

반군들은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혁명을 성공하였습니다.

 

피델 카스트로는 총리가 되었고 체 게바라는 그간의 활동을 인정받아 쿠바국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 정부의 각료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시기 체 게바라는 멕시코에 남아 있던 일다 가데아와 이혼하고

반군 활동 중 만난 전투동지 알레이다 마치와 재혼하였습니다.

 

1959년부터 1965년까지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 정국에서 라 카바니아 요새 사령관, 쿠바국립은행 총재,

쿠바 산업부 장관 등을 거치며 서방세계로부터 쿠바의 두뇌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1965년 4월,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에게 ‘쿠바에서 할 일은 다 끝났다’는 편지를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체 게바라가 쿠바에서 돌연히 사라진 것에는 그가 권력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신념대로 더 많은 민중을

혁명으로 해방시키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쿠바 혁명 성공 후 피델 카스트로와의 불화가 원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체 게바라는 쿠바가 미국이나 소련으로부터 완전한 경제적 독립을 하기를 원했지만

피델 카스트로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강대국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유지하는 쪽을 쉽사리 선택했고,

이는 체 게바라의 신념과 한배를 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이 체 게바라의 시신을 부검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 사진사 프레디 알보르타가 찍었다.

 

볼리비아에서의 혁명가의 죽음

쿠바에 작별을 고한 체 게바라는 돌연히 아프리카 콩고로 가 혁명군을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혁명군은 체 게바라가 이때껏 접해온 남미사람들과는 달랐으며,

아프리카만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체 게바라는 실패하고 다시 남미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볼리비아의 혁명에 가담했습니다.

 

당시 볼리비아는 1952년에 국민 혁명이 성공했지만

1964년 바리엔토스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국민혁명정부가 무너지고 군사독재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의 반독재 혁명군에 참가하여 남미대륙에서 혁명운동의 거점을 마련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체 게바라가 이끄는 혁명군은 볼리비아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으며,

 

그들은 외국인인 체 게바라보다는 볼리비아인 혁명 대장을 원했고

혁명군 내에서도 조금씩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체 게바라의 지병인 천식은 고산지대인 볼리비아에서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농민 노동자들과의 연대에 실패한 체 게바라는 산악지역을 전전하며 게릴라 활동을 펼쳤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결국 1967년 체 게바라는 미군의 지원을 받는 볼리비아 독재정권의 정부군에 체포되었습니다.

부상을 입은 그는 마을 학교에 포로로 잡혔습니다.

 

체 게바라의 남미에서의 인기와 그의 활동으로 남미 국가들을 장악하는데

골머리를 앓던 미국은 체 게바라의 총살에 동의했습니다.

 

체 게바라는 1967년 10월 9일 마리오 테란이라는 볼리비아의 하사관의 손에 의해 사살되었고,

죽기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알아두어라 너는 지금 사람을 죽이고 있다’

 

체 게바라를 쏜 마리오 테란은 6개월 후 자신의 집 4층에서 투신자살 하였으며,

체 게바라가 죽은 후 그의 시신을 확인한 영국의 <가디언> 기자 리처드 곳은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1963에 쿠바에서 체 게바라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미국에 대항한 전투에서 전 세계의 급진적인 군대를 지휘하려고 시도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제 그는 죽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이 그와 함께 사라질 수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의 말처럼 체 게바라는 사후, 오히려 그 영향력이 더 커져갔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체 게바라 열풍'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를 끌었으며,

프랑스의 68운동에서 그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많은 추종자를 낳았습니다.

 

이후 이념은 사라져가도 체 게바라라는 상징으로 굳게 남았습니다.

그의 사체는 30년 후 볼리비아에서 발굴 되어 쿠바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쿠바혁명의 성공 물꼬를 튼 산타클라라에 안장되었으며,

체 게바라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에 대해 추억했습니다.

 

에르네스토는 진실에 열광적이었습니다.

진실은 그의 환영이었지요.

전투할 때는 냉정했고 혁명과 관련된 모든 일에 굽힐 줄 몰랐던 만큼

그 아이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유머가 넘치는 아이였지요.

 

 

 

죽음 이후

그의 죽음을 입증하기 위해 볼리비아 정부는 그의 손을 잘라 고향 아르헨티나 또는 카스트로에게 보냈습니다.

얼굴이 이미 훼손되었기에 그의 데스마스크는 정확하지 않았고,

대신 그의 손을 보냈는데 이는 그를 식별할 증거는 그의 지문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신은 비밀리에 매장되었다가 30년이 지난 1997년,

유족을 포함한 볼리비아-쿠바 합동 조사단에 의해 바예그란데의 어느 폐쇄된 활주로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이후 쿠바 정부는 추모 주간을 선포하고 대규모 국장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심지어 산타클라라에 게바라를 추모하는 사원까지 생겼으며,

2013년에 볼리비아 정부의 협조 아래 게바라의 일대기가 담긴 일기와 편지, 신문기사, 사진, 문서 등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평가

간단히 말해서 혁명가로서는 성공했지만 정치가로서는 실패한 인물이라는 평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묘하게도 이는 게바라가 롤모델로 삼은 마오쩌둥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되는 평가입니다.

 

게바라는 녹색 의료, 니켈 생산, 원유 탐사, 설탕 부산물, 화학산업 등 9개의 연구·개발 기구를 설립했습니다.

또 회계 처리를 전산화하는 실험을 했고, 새로운 임금체계를 고안했고,

노동자의 발명 및 혁신을 장려했고, 농업 기계화를 진두지휘했고, 사회적 노동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을 시도했고,

사회적 임무로서의 노동 개념을 발전시켰으며, 노동자 경영 참여를 위한 기구를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비록 이것들이 오늘날 쿠바의 사회·경제 구조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를 고안하고 도입한 게바라의 기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메두사(medusa)의 목

메두사(medusa)의 목 희랍신화에 나오는 괴물. 세계의 서쪽 끝에 '고르곤' (Gorgon) 이라는 괴물 세 자매가 살고 있었는데 머리는 뱀이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졌으며 사람을 한 번 노려보기만 하면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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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핀과 치즈

 조세핀과 치즈 "조세핀, 오늘밤에는 안돼" 이 말은 '나폴레옹'이 그의 아내 '조세핀'에게 한 말로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유명한 말인거 다 아시죠!! '나폴레옹'이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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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스 해전

신의 계시를 받은 살라미스 해전 마라톤 경기가 페르시아와 아테네 사이에 벌어졌던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 에서 기원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아테네는 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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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속설 10 가지.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미신이 있습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외국인의 눈에는 한국인들의 어떤 미신이 인상 깊었을까?  한국에 거주하는 미국인 덤(Dom)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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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모가 대학총장이 된 사연

 

충남 예산에 꽃다운 처녀가 있었습니다.

 

이 꽃다운 처녀가
17살에 연지곤지 찍고 시집을 갔는데

시집간지 2년만에 서방이 갑자기 죽어 채 피지도 못한 19살 나이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볼때마다


"불쌍해서 어찌노~~나이가 아깝네!!"

 

하면서 위로해 주었지만

19살 과부는 죽은 서방이 너무도 원망스럽고 서러워 울기도 많이 울었지요.


그런던 어느날 마음을 다잡아 먹고 거울 앞에 앉아 긴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잘라 버렸어요.
 
그러면서 젊은 과부가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듣는 동정의 말들이 너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헤쳐나갈 방도를 곰곰히 생각했지요.

서방도 없고 자식도 없는 시댁에 더이상 머무를수도 없었지만, 무언가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지요.

 

친정으로 돌아간들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무작정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지요.

낯설고 물설은 서울 생활이 그리 녹녹한 것은 아니었지요.

그렇지만 이를 악물고 닥치는대로 일을 했지요.

 

식당에서 설거지도 하고 남의집 빨래도 하며

차츰 차츰 서울 물정에 눈을 떴을때 지인의 소개로 어느 부잣집 가정부로 들어가게 되었지요.

 

그녀는 그 집에서 밤낮으로 죽기살기로 일을 했어요.
그러자 마음씨 좋은 주인 어르신께 인정을 받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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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주인 어르신께서 나이도 젊은데 무엇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말하라 해서

조심스럽게 두가지를 말씀 드렸어요.


하나는
"야간 학교에라도 가서 늦었지만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고

또 하나는 "주일날이면 꼭 교회에 갈수 있게 해달라"고 했어요.

 

그러자 마음씨 좋은 주인 어르신께서 정말 기특한 생각을 했다면 젊은 과부의 소박한 소원을 들어 주었지요.


그래서 숙명여학교 야간부에 입학을 했는데

주인어른의 후광도 있었지만 일하고, 맞는 시간에 틈틈이 보아온 신학문이 큰 도움이 되었지요.

또 주일 날에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갈 수 있었어요.

 

그녀는 주인 어른의 큰 은혜에 감흡하여 낮에는 집에서 가정부일을 두배로 더 열심히 일했고
밤에는 학교에서 죽기 살기로 공부를 했어요.


그러다보니 최우수 학생이 되었고,
장학생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그녀의 실력과 성품을 인정 받아

그 때는 일제 강점기 때라 학교에서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 주었지요.

 

유학생 신분으로 일본에 가게된 젊은 과부는 너무도 기뻤고 감사했어요.
주인 어른신께도 감사했고 학교에도 감사했어요.
도쿄여자 사범대에 들어가 밤낮없이 공부에 전념하여 영광된 졸업장을 들고,

귀국했으며 그때 젊은 과부 나이가 30세 였지요.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포구에 내린 젊은과부는 몰라보게 달라졌어요.
예산땅 젊은 과부가 영화배우 윤심덕처럼 멋쟁이가 되어 돌아 왔지요.

 

그녀는 서울에 돌아와 모교인 숙명여고 선생님이 되었지요.
그렇지만 그녀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 열심히 공부하며 후배들을 가르쳤어요.

 


그러자
1939년 숙명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지요.
교수로 임용된지 6년만에 그녀는 교장이 되었지요.

 

전공은 우리나라 한복과 양장을 가르치는 의상 재봉이었지요.

해방과 함께 숙명여자 전문학교가 대학교로 바뀌면서 19살 젊은 과부가 초대 총장이 되었지요.


그녀가 바로 숙명여자대학 임숙재 초대 총장 입니다.

그녀는 숙명여대를 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19세 젊은 과부가 총장이 되기까지 불굴의 의지로
운명을 바꾸어 놓은 위대한 사람이었지요.

 

 

초대이사장 임숙재


그녀는 제자들에게

"성공하기를 원하나요?

그럼 자신의 환경을 다스리세요!" 라고 

늘 가르쳤다 합니다.

 

 

임숙재(1891년~1961년)
충남 예산군 출신
1913년 숙명고등여학교를 졸업
1917년 일본으로 유학 1921년 일본에서 귀국후 숙명여고 대구 경북고등학교 교사로 근무
1939년 숙명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임용
1945년 숙명여전 교장이 되었고
1955년 숙명여대 초대총장에 취임
1958년 숙명여대 명예총장이 됨
1961년 향년 71세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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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링컨과 케네디의 20가지 공통점  

 

모방송국 TV 내용중에 서프x이즈라는 방송에서도 나왔지만,

미국 대통령 중에 링컨과 케네디 대통령의 일치사항들이 너무 신기하여 알아봤습니다. 

 

여러분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인 링컨과 케네디는 우연의 일치 인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링컨과 케네디의 신기 할 정도로 비슷한 공통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번 해볼려고 합니다.

아래의 항목들은 학자들이 분석한 링컨과 케네디 대통령의 일치사항들 입니다.

 

 

1.  두 대통령이 모두 머리에 총알을 맞고 사망 하였다.

 

2.  링컨은 포드극장에서 죽었고, 케네디는 포드사의 링컨자동차에서 사망하였다.

 

3.  링컨을 죽인 범인은 극장에서 암살하고 창고로 도망간뒤 붙잡혔고,

      케네디를 죽인 범인은 창고에서 암살하고 극장으로 도망간뒤 잡혔다.

 

4.  두 대통령의 뒤를 이은 부통령들의 이름이 모두 존슨이었다.

 

5.  두 대통령이 모두 흑인들을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다.

 

6.  두 대통령이 모두 불어를 할줄 아는 24세의 여성과 결혼하였다.

 

7.  링컨은 1846년에 국회의원에 선출되었고, 케네디는 1946년에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

 

8.  링컨은 1860년에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고, 케네디는 1960년에 당선 되었다.

 

9.  두 사람이 모두 금요일에 죽었다.

 

10.  두 사람이 모두 뒷머리에 총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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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두 사람이 모두 총을 맞을때 부인이 옆에 앉아 있었다.

 

12.  링컨의 뒤를 이은 앤드류 존슨 부통령은 1808년생이고,

         케네디의 뒤를 이은 린든 존슨 부통령은 1908년생이라는 것이다.

 

13.  링컨 대통령의 암살범 존 윌크스 부스는 1839년생이고,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범 리 하비 오스왈드는 1939년생이라는것.

         암살범들과 후임 대통령들이 모두 남부출신 이라는것.

 

14.  두 사람이 모두 백악관에 있을때 자식중의 한명을 저 세상으로 보냈다.

 

15.  링컨 대통령의 비서 이름은 케네디였고, 케네디 대통령의 비서 이름은 링컨이었다.

 

16.  암살 당하는날 두 비서들은 모두 그 장소에 가지 말라는 부탁을 하였다.

 

17.  링컨(Lincoln)과 케네디(Kennedy)의 이름이 모두 7자의 알파벳인 것.

 

18.  앤드류 존슨과(Andrew Johnson)과 린든 존슨 (Lyndon Johnson)은 알파벳이 13자로 일치하는것.

 

19.  암살범인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와

         리하비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는 15자의 알파벳으로 일치하는 것.

 

20.  두 암살범이 모두 재판을 하기전 의문사를 당한것.

         링컨은 죽기 일주일전 마릴린의 몬로라는 곳에 있었고,

         케네디는 일주일전 마릴린 몬로와 있었다는것.

 

과연 두 대통령의 암살사건 속에

이토록 많은 사항들이 일치하고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요?

 

알고보면 이해되는 몇가지 사실들

우리들이 잘몰랐던 몇가지 사실들  1. 워싱턴D.C 고층 건물 워싱턴D.C 에는 고층 건물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국회의사당(높이 94m) 보다, 더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도록 건축법이 제정돼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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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면 손해보고, 알면 유익한 생활상식

모르면 손해보고, 알면 유익한 생활상식  1. 양치 후 양치물을 변기통에 뱉고 10분 후 물을 내리면 신기하게 악취가 사라집니다. 2. 달걀을 삶기 전에 소금을 약간 넣어주거나 식초를 몇 방울 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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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털ㆍ범털의 차이

개털ㆍ범털의 차이  ‘개털’은 물리적으로 개(犬)의 털(毛)을 뜻한다. 상징적으로는, 교도소에서 돈도 면회자도 없는 죄수를 칭한다. ‘범털’의 대척이다. 해서 쓸 데라고는 어디에도 없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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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기스칸과 그의 제국  

13세기에, 중국인들은 단지 유럽인들의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양측 모두 어느 한사람에 의해서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었는데,

징기스칸과 그의 유목민 무리들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부터 온 것처럼 보였으며,

온 지구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까지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중국이나 유럽문명에 관해 그다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던 몽고의 전쟁군주

징기스칸은, 아마 세계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군대의 지도자로 군림했는데, 

그는 유르트에서 자고, 빠르고 억센 몽고의 종마를 타고 다녔다.

 

12세기 후반에 그는 몽고족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몽고제국의 잠재적인 역량에는 한계가 없어 보였다.

 

몽고인들은 중앙아시아의 넓은 광야에 사는 유목민들이었다.

오랜 기간동안, 그들은 서로 싸우거나 중국제국의 변방 마을을 노략질하는 것으로 스텝지방내에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 본거지의 주변부 너머에 사는 사람들만이 그들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뿐이다.

 

기원전 200년경에 건설된 중국의 만리장성은 대체로 몽고인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유럽인들도 몽고인들이 거주하는 춥고 높은 사막지대로부터 수천마일 떨어져서 존재하고 있었다.

결국에 가서는 이러한 성벽도 공간적인 거리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징기스칸은 첫 목표를 타르타르족으로 잡았다.

그들을 물리친 후에 그는 중국이 있는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당시 중국에는 금나라가 멸망 직전이었으며, 따라서 약탈적인 몽고인들에게는 중국은 손쉬운 대상이었다.

 

징기스칸은 1214년 북경을 점령했고, 1219년에는 대부분의 중국을 손에 넣었다.

그러자 그는 그의 정복에 관해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서쪽의 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중무장된 기병의 거대한 물결로 알이름을 떨친 "몽고족"들은 러시아를 거쳐서,

페르시아 제국을 먹어치운 후 폴란드와 헝가리를 삼켜버리면서 모든 유럽을 위협했다.

 

 

이후 8년의 기간동안, 징기스칸은 세계가 이전에는 미처 보지못했던 거대한 제국을 만들어 나갔다.

단지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한 대영제국만이 징기스칸의 제국보다 조금 컸을 뿐이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카이사르, 혹은 페르시아의 황제들와는 달리, 징기스칸의 정복에 대한 생각은,

점령해서 이민족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유린하고, 약탈하고, 

그리고 그의 앞길을 놓여있는 것은 무엇이나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가 완전히 인간 생명을 경시했다는 사실은, 온 유라시아 대륙을 통해서

그의 존재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 유목민 부족의 승리는 징기스칸의 통솔력과 그의 몽고통일에 전적으로 의지한 것이었다.

오가디칸이 징기스칸의 사후에 그를 계승하고 정복을 계속했지만, 몽고의 위압적인 힘은 궁극적으로 활력을 잃고,

유목민들은 중앙아시아로 돌아가게 된다.

 

결국, 몽고제국이 역사속에서 가져왔던 가장 중요한 영향은, 서로 지구의 반대쪽에 살던 사람들

-유럽인과 중국인-에게 상대방에 대한 자각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십자군 원정은 중동과 유럽 사이의 고대의 대화를 다시 열어주었다.

그러나 몽고와의 접촉후에야 유럽인들은 극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징기스칸과 그의 제국(AD 1227)

▶ 1248 독일의 쾰른 대성당 걸설.

▶ 1249 알퐁소 3세는 포루투갈에서 무어인을 몰아냄.

▶ 1252 스톡홀름이 스웨덴에 세워짐.

▶ 1260 파리는 직조공업의 중심지가 됨.

▶ 1264 시몽 드 몽포르는 헨리 3세를 물리침.

▶ 1266 앙주의 샤를르 1세는 나폴리와 시실리의 왕이 됨.

▶ 1274 몽고는 일본을 정벌함.

▶ 1284 제노아의 함대는 피사를 물리치고 지중해의 맹주가 됨.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미야모토 무사시는 1584년 검객 신멘 무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미마사카 국, 하리마 국 등의 설이 있다. 무사시가 저술한 『오륜서(五輪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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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

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 1954.1.14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다. 마릴린 먼로(마를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의 만남은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두 세계’의 절묘한 결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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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4대 악녀

1. 은의 달기  ​ [주지육림]의 주인공 달기 주 왕과 달기: 중국에는 4대 악녀와 4대 미녀가 있다고 하는데 ‘달기’는 그 4대 악녀 중 한 사람이다. ​ ‘달기’에 관한 기본 사료로서는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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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4대 미녀

중국의 4대 미녀하면, 서시,왕소군,초선,양귀비를 일컫습니다. 오늘은 중국의 4대 미녀 이야기를 간단하게 해보겠습니다. 침어낙안(沈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 沈魚落雁  물고기는 물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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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미야모토 무사시는 1584년 검객 신멘 무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미마사카 국, 하리마 국 등의 설이 있다.

 

무사시가 저술한 『오륜서(五輪書)』에는 하리마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에도 시대 후기의 지리서인 『동작지(東作誌)』에는 미마사카 국에서 태어났다고 적혀 있다.

 

미사사카 국이 현재의 오사야마 현 북동부에 해당되는 지역이며,

동으로는 하리마 국과 연결되어 있어 출생지에 대한 혼란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출생년도도 불확실하나 『오륜서』에 1643년에 60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1584년생이라 생각된다.

 

 

 

어릴 때는 시치노스케, 도모지로 등으로 불렸다. 

아버지 신멘 무니는 도리류(當理流) 검법을 창시한 인물로,

무사시는 어려서부터 이 검법을 배워 전국을 방랑하였고,

나중에 외가 쪽의 성을 사용하여 미야모토 무사시라고 칭하였다.

 

무사시의 저서인 『오륜서』에는 ‘나는 어려서부터 병법에 심취하여 13세 때 처음으로 승부를 겨루었으며,

21세 때 교토에 와서 천하의 병법자를 만나 몇 번 승부를 겨루었지만 승리를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 후 각국 곳곳에서 각류의 병법자와 만나 60여 차례 겨루었지만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이것이 13세부터 28~29세 때의 일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후세에 알려진 요시오카 기요쥬로,

사사키 고지로와의 대결 등이 모두 이 기간 중의 이야기이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인 간류지마(巖流島) 의 결투

 

간류지마의 결투(巖流島の決闘)로 알려진 고지로와의 결투는

후나지마(후에 간류지마로 불림)에서 벌어진 것으로,

이 결투에서 고지로는 무사시의 죽검에 의해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30세를 넘어서는 자신의 검법에 대한 반성을 시작하였고,

50세경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검법의 도를 체득한다.

 

 

  구마모토 번에서 자리를 잡다  

 

1634년에는 규슈의 고쿠라에 가서 번주인 오가사와라 다다자네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시마바라의 난 진압 시 양자인 미야모토 이오리와 함께 참가하였다.

 

1640년에는 구마모토 번주 호소카와 다다토시의 초대로 구마모토로 옮겨 번사들을 지도하였고,

『병법35개조』를 저술하여 번주에게 올리기도 하였다.

검술뿐 아니라  번사들과 함께 연가(連歌), 그림, 다도 등을 즐겼다고도 전해진다.

 

구마모토 번에서는 영지 3백 석과 17인 후치(扶持, 1인을 고용할 수 있는 양의 쌀)를 받고

중견 가신에 해당하는 오구미가시라(大組頭)로 대접받았다.

 

1643년 자신의 병법을 종합한 『오륜서』를 저술하였고, 1645년경부터 급속도로 체력이 떨어지면서는

말년에 자신을 돌아보고 느낀 점에 대한 훈계서인 『독행도(獨行道)』를 저술하였다.

 

이 책을 저술하고 며칠 후 62세로 무사시는 사망한다.

생전에 태승사(泰勝寺)의 하루야마 화상에게 니텐이라는 법호를 받았으며,

구마모토 시 다키다쵸에 있는 무사시즈카(武蔵塚)가 무사시의 묘로 알려져 있다.

 

 

 

미야모토 무사시(1582~1645)의 나라 일본의 수많은 검객들 중에서도 단연 첫손에 꼽히는 인기를 누리는

국민적 영웅으로 일본에서는 검성으로 불리며 추앙받는다.

 

초기 에도시대의 전설적인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는

1582년 그가 태어나던 해에 다케다 가쓰요리가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할복하여, 석달 뒤에는 오다 노부나가가 자살하면서 군웅할거의 전란은 점차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치열했던 군웅할거 시대에 끝자락을 잡고 태어난 그였기에 한평생 일관되게 싸움에 직면할 수 있었고,

스스로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는 일평생 60여 차례의 결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13세 어린 나이에 아리마 기헤이와 대결해 생애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무사의길로 접어들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검법을 연마했다.

 

 

 

19세 때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으며,

21세에 교토로 상경했다가 다시 천하를 돌아다니며

29세가 될 때까지 다른 유파의 쟁쟁한 고수들과 60여 차례 결투했고,

단 한 번도 패배를 맛본 적이 없었다.

 

1612년 간류 섬에서 사사키 고지로와 대결해 승리를 거두고,

이를 끝으로 더는 결투를 벌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4세에는 오사카 여름전투에 참전했으며,

1638년 시마바라의 난이 발생하자 무사시는 당시 57세의 나이로 출전했다.

 

1643년, 62세가 된 무사시는 관음신앙의 성지로 유명한 레이간도에 기거하며

『오륜서』를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죽기 1년 반 전의 일이었다.

 

죽음을 직감한 무사시는 전쟁을 접하지 못한 후세들에게 병법을 전수하기 위해

자신의 병법을 글로 남기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집필하던 도중에 병을 얻어 1645년 5월 19일, 6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되고,

미완성된 『오륜서』는 『병법 35개조』, 『독행본』과 함께 그의 제자들에게 양도되었다.

 

무사시는 누구나 문무를 두루 겸비하고 병법을 지탱해줄 기예를 두루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무사시는 병법자로서 아카시 성의 토지 계획을 시행하는가 하면,

그림과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화가로서 <고목명견도>, <포대관투계도> 등 예술작품을 남겼는데

그림의 일부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오륜서  

 

전설적 CEO인 잭 웰치가 『오륜서』를 위대한 세계적 군사이론, 나아가 경영전략서로 극찬한 데는 이유가 있다.

하버드대학 MBA와 미 육군사관학교의 교재로도 쓰이는 『오륜서』는 단순한 검법서나 병법서의 차원을 넘어,

그리고 시공간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삶과 승부의 세계, 경영의 세계에 대한 본질을 통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륜서』는 목숨을 건 진검승부의 세계에서

이기고 살아남은 검성 무사시의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위대한 고전이다.

 

단순한 칼잡이가 아니라 서화와 조각에 능한 예술가이자 불교와 노장사상을 깊이 이해한 철학자이기도 했던

무사시는 육체적 무기인 칼의 세계를 정신적 문화인 도의 경지로 고양시켰다.

 

이런 배경에서『오륜서』는 명실상부한 동서양 고전의 반열에 올랐고,

21세기 서양 지식인들과 기업인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애독되고 있다.

 

무사시의 위대함은 통념화된 관념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성찰을 통해 칼과 전투에서 출발해 보편적인 사상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 있다.

 

칼과 무사의 전통이 강한 일본에서 역사상 최고의 사무라이로 인정받는 미야모토 무사시는

전국시대 말기에 태어나 도쿠가와 막부 초기에 생을 마감했다.

 

불패의 검객이었던 무사시는 터득한 검법을 고도의 정신성으로 승화시킨

『오륜서』를 남겨 검도의 원조가 되었다.

 

  『오륜서』에는 무사시의 검법 정신, 자기 수련, 승리 전략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륜서』의 소재는 칼싸움에서 상대를 먼저 베는 검법이지만, 핵심주제는 몸과 마음을 수련해 승리에 이르는 전략과 리더십, 생존을 위한 자기수련이다. 무사시는 칼싸움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출발해 승부사의 사생관, 개인은 물론 조직의 리더로서 상대방을 이기는 전략, 심신을 갈고 닦는 자기계발에 이르는 폭넓은 주제로 확장한다. 단순한 고전이 아니라 현대인들과도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대목이다.

 

사무라이의 나라 일본의 수많은 검객들 중에서도 단연 첫손에 꼽히는

인기를 누리는 국민적 영웅으로 일본에서는 검성으로 불리며 추앙받는다.

 

무사시의 병법은 지식이 아니라 실천학이면서,

승부사의 본질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시대와 공간의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는다.

 

그것이 바로 『오륜서』를 위대한 고전이게 하는 핵심요인이다.

무심코 보면 이 책은 무사시의 검법과 적을 베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의미를 하나하나씩 짚어보면 우리의 현실을 비춰주는 거울이 된다.

약 60회의 결투에서 승리한 미야모토 무사시의 비법만을 담고 있는 듯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적이 바로 오늘날의 우리가 말하는 나와 경쟁하는 라이벌 혹은 성공을 위한 목표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무사와의 결투에서 살아남는 것과 오늘날의 사회에서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결국 같은 의미인 것이다.

 


 『오륜서』는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땅(地)의 장으로 기초를 위한 장이다.

경쟁 속에서 이겨 살아남아야 함을 처음부터 말하며, 병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2장은 물(水)장으로 1장에서 말한 병법을 기본으로 유연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유연성은 기초를 바탕으로 응용력을 기르고, 기본에 집착하지 않으며,

이기기 위해 생각을 다양하게 하는 것이다.

 

3장은 불(火)의 장으로 평정심을 다룬다.

장수가 갖춰야 할 리더십, 적의 심리를 이용한 전술, 나보다 강한 적을 상대하는 방법 등이 나온다.

 

4장은 바람(風)의 장으로 남을 통해 자신을 비춰보는 장이다.

무사시는 자신이 만든 니텐이치류만이 최고라 생각하지 않고 다른 유파를 통해 병법을 도를 되돌아보고,

무사의 기본에 대해 이야기한다. 

 

5장 하늘(空)의 장은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끊임없이 수련하는 것이 새로운 경지를 추구하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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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궁금한 모모파크

일상 생활에 지나쳐 버리기 쉬운, 소소한 궁금증을 하나씩 알아보고 상식과 지식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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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

 

1954.1.14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다.

마릴린 먼로(마를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의 만남은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두 세계’의 절묘한 결합이었다.

 

1950년대 영화산업은 최고의 절정이었고, 미국의 프로야구는 모든 미국인들의 공통된 화제였다.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는 세계를 유혹하는 섹스 심벌로 명성을 더해가고 있었고,

조 디마지오는 미국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존재였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세기의 결혼식

1951년에 은퇴한 조 디마지오는 메이저리그 56경기 연속안타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우고

통산타율 3할2푼5리 홈런 361개를 친 전설의 메이저리거로 인기 절정의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와의 결혼 소식을

들은전 세계 사람들은 설레는 가슴으로 두방망이질했다.

 

 

1954년 1월 14일, ‘20세기 최고의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와 프로야구의 상징적인 강타자 조 디마지오는

그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두 사람 모두 두 번째 결혼이었다.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는데,여행 중 먼로는한국을 방문하여 미군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갖기도 했다.

2월 12일 공연을 앞두고 대구 동촌비행장에는 먼로를 환영하기 위해 배우 백성희와 최은희가 마중을 나갔고,

세계적인 여배우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인해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향수병에 걸려 있는 군인들을 상대로 한 미군부대에서의 공연이 더욱 열광적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먼로가 직접 쓴 <마이 스토리>에 그때 공연 모습이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먼로가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한 장교가 당황한 모습으로 다가와 말했다.

“예정보다 일찍 무대에 오르셔야겠어요. 더는 군인들을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무대 위로 돌을 던져대고 있어요.”

 

 

공연을 마친 먼로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디마지오와 함께 여행을 즐겼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두 스타의 결혼생활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두 사람의 불화는 이미 예정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먼로가 만인의 주목을 받기를 원했다면 디마지오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뭐든 싫어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은 9개월 만에 파경을 맞게 된다. 10월 4일 먼로의 변호사가 이혼을 발표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애정이 완전히 식은 것은 아니었다.

디마지오는 먼로가 세 번째 결혼에도 실패하고 약물중독에 빠졌을때다시 사랑의 손길을 내민다.

재결합을 목전에 둔 1962년 8월 5일, 먼로는 서른여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그 후 디마지오는 20여 년 이상 매주 장미꽃을 그녀의 무덤에 바쳤다.

1999년 디마지오는 숨을 거두기 전 “이젠 먼로를 다시 볼 수 있겠군”이라고 말했단다.

그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화제 만발했던 결혼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영원할 것이다.

2006년 5월에는 그들이함께 사인한 야구공이 19만1200달러(당시약 1억8000만원)에 팔리기도 했다.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노마 진은 심한 애정결핍에 시달리게 되었다.

어머니가 정신분열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수용된 뒤에는 어머니의 친구 집에서 생활하다가

고아원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1942년 6월 19일, 마지막 보호자 그레이스 고다르의 주선으로 노마 진은 제임스 도허티와 결혼했다.

그러나 도허티는 해병대에 입대했고, 혼자 남은 노마 진은 군수공장에서 일하다가

1945년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버를 만나 모델과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노마 진의 꿈은 이제 스타가 되는 것이었지만, 도허티는 노마 진의 일을 하찮게 여겼다.

1946년 9월 13일 두 사람은 이혼에 합의했다.

이혼한 노마 진은 할리우드로 향했다.

 

1946년 8월 26일, 노마 진은 이름을 마릴린 먼로로 바꾸고, 20세기폭스사와 첫 계약을 맺었다.

주로 모델로 활동했지만, 그것은 여배우로 성장하기 위한 전초 작업이었다.

 

1947년 마릴린 먼로는 첫 번째 영화 <스쿠다 후! 스쿠다 헤이! Scudda-Hoo! Scudda-Hay!> (1948년 개봉)에 출연

하지만, 편집과정에서 그녀의 연기는 대부분 잘려나가고 영화사와 계약도 연장되지 않는다.

 

 

이후 그녀는 <위험한 세월 Dangerous Years>(1947), <코러스의 숙녀들 Ladies of the Chorus>(1949),

<러브 해피 Love Happy>, <아스팔트 정글 The Asphalt Jungle>(1950),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Gentlemen Prefer Blondes>(1953),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 How to Marry a Millionaire>(1953) 등에 출연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다.

특히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는 먼로가 ‘섹스 심벌’로서의 이미지를 굳히는 데 크게 기여한다.

 

 

 

 

1954년 먼로는 조 디마지오와 혼인한 후 <7년 만의 외출 The Seven Year Itch>(1955년 개봉)을 촬영한다.

이 영화로 인해 먼로는 특별한 이미지를 세계에 선물한다.

 

지하철 환풍구 바람에 드레스가 들리는 관능적이면서도 코믹한 장면은 그해 9월 15일 뉴욕에서 촬영된 것이다.

매력적인 외모뿐만 아니라 연기력도 인정받고 싶어했던 먼로는 뉴욕의 액터스 스튜디오에서 리 스트래스버그로부터 연기를 배웠다.

 

 

탁월한 연기력까지 갖춘 그녀는 할리우드로 돌아와 <버스 정류장 Bus Stop>(1956),

로렌스 올리비에와 공연한 <왕자와 쇼걸 The Prince and the Showgirl>(1957),

<뜨거운 것이 좋아 Some Like It Hot>(1959), <부적합자 The Misfits>(1961) 등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영광 속에 숨어 있는 파멸

영화배우로서는 승승장구했지만, 그녀의 영광 속에는 늘 파멸에 대한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다.

1956년 7월 1일 유대인 극작가 아서 밀러와 혼인하지만, 5년 만에 파경을 맞이한다.

 

그녀는 과학자 아인슈타인, 가수 프랭크 시네트라와 이브 몽탕,

존 F. 케네디와 로버트 케네디 형제와의 염문설도 뿌렸다.

이러한 화려한 연애 속에는 어쩌면 애정결핍에 시달렸던 어린 시절의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노마 진의 어린 시절에 대해 페미니스트 안드레아 드워킨은

마릴린 먼로의 <마이 스토리> 서문에서 “이 어린 여자아이에 비하면 문학에 등장하는

불우한 어린 주인공들은 상황이 꽤 좋았던 셈이다.

 

디킨스도 이렇게 강하고 재치 있고 무지하고 가엾은 아이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드워킨은 또 마릴린 먼로의 남자들에 대해 그들이 “그녀의 찢어지고 곪은 상처에 소금을 대고 문질렀다”고 말한다.

 

섹스 심벌로서의 먼로의 이미지는 어쩌면 남성 판타지가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먼로를 유명하게 했지만, 그것이 또한 그녀를 불행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마릴린 먼로 하면 ‘섹스 심벌’이라는 말과 ‘백치미’의 여인을 떠올린다.

지하철 환풍구 위에서 허벅지가 드러나도록 치마를 펄럭이며 천진하게 웃는 모습,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

도발적인 입술, 반쯤 감은 눈, 출렁거리는 금발 미인, 그것이 우리가 떠올리는 먼로의 이미지다.

러나 그 이미지의 이면에서 그녀는 모순된 우리 사회에 대해 상당한 깊이의 문제의식을 가진 배우였다.

 

 

  "나는 '섹스 심벌' 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먼로가 가장 좋아한 미국인은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

링컨은 그녀가 아는 인물 중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대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할리우드에서 블랙 리스트에 올라 있던 작가 링컨 스테펀스의 작품을 탐독했다.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와 달리 먼로는 만만찮은 지성을 갖춘 배우였던 것이다.

 

그녀는 <라이프> 지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섹스 심벌’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의 심벌이 되었든 이 심벌은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

섹스 심벌이 사물화될 때 그렇다.

나는 물건 취급 당하는 것이 무엇보다 싫다.

하지만 내가 어떤 것의 심벌이 되어야 한다면 기꺼이 섹스 심벌이 되겠다.

 

어떤 여자들은 스스로든 스튜디오의 유혹에 의해서든 나처럼 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 여자들은 전방이나 후방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 중간에서 살고 있다.” 먼로는 스스로가 최전방 또는 최후방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영광의 첨단이자 불행의 심연일 수 있다.

 

이러한 발언은 백치미의 그녀가 결코 백치가 아님을 보여준다.

 

영화평론가 유지나의 마릴린 먼로에 대한 발언은 그녀의 진가를 다시 한번 생각게 한다.

“정치적 자유를 갈망하고,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진보적 이데올로기를 추종했던 배우,

반공을 애국적 광기로 몰아가던 매카시즘에 저항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던 용기 있는 배우,

인민주의를 이상으로 삼아 인민(people)이라는 말을 좋아했던 배우,

 

자신의 신체적 매력을 전략적으로 남성 판타지 속에 투사하며 가부장적 할리우드 시스템에서 생존을 시도했던

파워 페미니스트로서의 잠재적 가능성을 지닌 여성, 연기를 통한자아 실현의 의지를 갖춘 철학적 시인 같은

지성적 배우, 고독을 친구 삼아 철저하게 자기 준비를 했던 프로, 대중이 만들어준 스타의 공익적인 기능을

간파한 동시에 장식품이 되기를 거부했던 지성, 그러면서도 자아 도취와 자기 혐오라는 극단적인 인지

부조화 속에서 죽음으로 자신을 내몰 정도로 순수하게 자신을 직면했던 마릴린 먼로!”

 

 

1962년 6월 1일은 먼로가 20세기폭스 사와 마지막으로 작업한 날이자 공개석상에 모습을 보인 최후의 날이었다.

이후 그녀는 극심한 조울증 증세를 보였다.

 

1962년 8월 5일 이른 아침,

마릴린 먼로는 집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사인은 수면제 과다로 발표되었다.

그녀는 갔지만, 그녀가 남긴 이미지는 우리에게 영원히 있다.

 

그 이미지 때문에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저승으로 무대를 옮겼다.

조 디마지오는 저승에서 마릴린 먼로를 ‘다시’ 만나 ‘어떻게’ 사랑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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