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최고의 미녀 장연홍
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 최고의 미녀
양 기생 - 장연홍
조선시대 최고의 미녀 장연홍
1911년 평양에서 외동딸로 태어나 5세 때 부친이 사망하자
가정형편으로 14세 때 평양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기생이 된 그는 뛰어난 외모와 춤,노래, 모델 활동 등으로 이름을 알렸다.
해어화(解語花) 라는 말이 있다.
말을 이해하는 꽃이란 뜻으로, 미인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인데,
당나라 현종(玄宗)이 비빈(妃嬪)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연꽃을 구경하다가,
양귀비(楊貴妃)를 가리켜 "연꽃의 아름다움도 '말을 이해하는 이 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해어지화(解語之花)'라고도 한다.
1920년대 진정한 해어화가 있었다.
조선시대까지 우리 고유의 예악을 담당해온 기생은,
일제강점기 신분 해체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도 그 명맥을 이어갔다.
매춘부보다는 연예인 같은 느낌이었다.
문학, 가곡, 거문고, 한문, 사군자, 일어, 독문에까지 학습과목이 다양했다.
그만큼 모든 분야에 걸쳐 능통했다.
구한말, 기생들 가운데 특히 이름을 떨친 장연홍,
그녀는 1911년 평양, 유복한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친이 사망하여 가정 형편이 기울자
14살 때 직업 기생을 길러내는 교육기관인 권번에 들어갔다.
그렇게 기생의 길을 시작한 자연 홍은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예악 실력으로 급부상했다.
꿈을 꾸듯 몽환적인 눈매 사람을 금방이라도 삼킬 듯한 표정으로 유명했다.
비누 광고 등에서 모델 활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 최고의 미인상이었던 장연홍의 이름을 더욱 빛나게 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뚜렷한 소신이었다.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친일파 이지용이 장연홍을 자신의 소실로 삼으려 한 적이 있었다.
이지용은 일만 원이라는 당시 엄청난 거금으로 장연홍을 유혹했다고 전해진다.
장연홍은 그런 이지용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라를 욕보인 더러운 자에게 꿇느니 죽음을 택하겠다."
미모와 더불어 배포까지 남달랐던 장연홍이었다.
수많은 이를 밤참 설치게 했던 그는 돌연 기생 생활을 접고,
21살 젊은 나이에 상해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소식은 영영 전해지지 않았다.
일본 영사관에 붙들러 갔다는 소문만이 무성하게 남았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됐는지 아무도 모르는 조선의 아름다운 여인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져 소문만 있을 뿐 이후에 행적은 알 수 없다.
친일파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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