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기군과 임오군란
조선 고종 때 개화 정책을 펼치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만들어진 신식 군대이다.
구식 군대에 비해 좋은 대우를 받았고,
이로 인해 구식 군대의 불만을 사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나라의 문을 연 조선은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개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일본에는 수신사(修信使),
청나라에는 영선사를 파견하여 문물제도의 시찰과 근대적 기술학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또 신문화 수입의 태세를 갖추기 위해,
청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였다.
특히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한 신무기 도입과 군대 개혁에 가장 관심이 높았던 고종은
조선에도 서양과 같은 신식 군대를 만들기로 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문호개방 후 새로운 신식문물이 들어 오게되고,
우리의 뒤떨어진 문물 제도와 격렬하게 만나 충돌하며 뒤섞이는 격동(激動)의 시대였다.
마침내 1881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창설되었다.
오군영에서 가장 뛰어난 군인으로 선발된 80명이 별기군의 첫 구성원이었다.
일찍부터 고종의 의도를 파악한 일본은 소총을 기증하는 한편,
별기군에게 신식 군사 기술을 가르칠 교관을 파견하겠다고 제안했다.
고종이 이를 받아들여 일본인 교관이 별기군을 훈련시켰는데,
이 때문에 ‘왜별기’ 즉 일본의 별기군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별기군은 구식 군인에 비해 월등히 높은 월급과 좋은 대우를 받았다.
당시 오군영에 속한 구식 군인들이 13개월이나 녹봉을 받지 못한 것과는 대조적인 차별 대우였다.
이에, 불만을 가진 구식 군인들은 임오군란을 일으켰고,
결국 별기군은 해체되고 말았다.
별기군으로 구성할 군인들을 선발한 오군영은 조선 후기의 중심 군대였다.
훈련도감과 어영청, 총융청, 금위영, 수어청 등 5개의 군영을 합쳐 ‘오군영’이라고 했다.
훈련도감과 어영청, 금위영은 주로 한성(한양)을 지키고,
총융청과 수어청은 그 외곽 지역을 담당했다.
임오군란 때 구식 군인들의 공격을 받았던 별기군 중
살아남은 군인들은 다시 오군영으로 돌아갔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군사제도가 다시 옛 군영체제로 바뀌면서 별기군은 모두 오군문의 본대로 되돌아갔다.
시대적 분위기 미숙으로 새로운 군사 개혁이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별기군은 정부의 개혁의지와는 달리 단명에 그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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