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황제들의 "사치"
로마 황제들은 광대한 부와 권력을 소유했기 때문에 많은 사치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전쟁이나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 수많은 자원과 노동력을 소모하면서도 동시에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공공 건축물과 건설 프로젝트
로마 황제들은 수많은 건축물과 프로젝트를 주도했습니다.
콜로세움, 판테온, 바시칸 궁전 등은 황제들이 굉장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 건설한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폭탄적인 화려함의 궁전과 빌라
로마 황제들은 자신들의 궁전과 빌라를 화려하게 꾸미는 데 큰 비용을 들였습니다.
황제들은 자신의 궁전과 빌라를 호화롭게 장식하고 여러 예술 작품으로 장식했습니다.
음식과 낭비
황제들의 식사는 매우 사치스러웠습니다.
그들은 희귀하고 고가의 음식을 즐겼으며, 자신들의 연회나 축제에서 많은 양의 식량과 음료를 낭비했습니다.
의상과 보석
로마 황제들은 화려하고 비싼 옷과 보석을 착용했습니다.
그들은 골드나 보석으로 장식된 의상을 입고 주변에 자신의 부를 과시했습니다.
포경적인 여가 활동
많은 황제들은 고가의 여가 활동에 많은 시간과 자원을 투자했습니다.
특히 새로운 예술 작품의 수집, 문학, 음악 등에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이러한 사치스러운 삶의 양상으로 인해 종종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이는 로마 제국의 부패와 몰락에 기여한 요인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로마 황제들의 "유흥과 광기"
칼리굴라
칼리굴라(Caligula)는 로마 제국의 제3대 황제였습니다.
그의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였지만,
"칼리굴라"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칼리굴라라는 별명은 어린 시절 군복을 입고 함께 군사 캠프를 돌아다닌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칼리굴라"는 로마 군인들이 신병을 가리키는 구두말인 "칼리구라"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칼리굴라는 37년에서 41년까지 황제로 살며, 그의 통치는 극도의 폭력과 무분별한 행동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초기에는 통치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인물로 여겨졌지만,
그 후 광기 어린 행동과 잔인한 통치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그의 치부는 사치스러움과 잔인함에서 나타났습니다.
칼리굴라는 제국의 자원을 낭비하고, 황제로서 권력을 남용했으며, 국가의 자금을 비난할 정도로 낭비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가족과 신하들을 핍박하고 잔인하게 살해하는 등의 행동으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이러한 행동들로 인해 그의 통치는 제국 내에서 점차적으로 불만을 증폭시켰고,
결국 그는 그의 경호원에 의해 암살당하게 되었습니다.
칼리굴라의 통치는 로마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황제 중 하나로 남아있으며,
그의 폭정과 광기로 인해 그의 이름은 광기 어린 통치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칼리굴라는
누나와 여동생 등과 수시로 성적인 관계를 갖으며, 한 끼의 식사 비용으로 수십억의 비용을 지출을 자주 하며, 바다를 건너기 위해 5Km의 다리를 건설하고, 이를 위해 산을 만들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공사를 실시하며, 성당 위에 올라가 엄청난 금액의 돈을 뿌리기를 일삼으며, 전대 황제들이 모아 놓은 돈을 1년 만에 탕진합니다.
또한, 검투사 대회나, 미인 대회에 매일같이 억만금을 투입하며,
초호화 갤리선을 만들어, 캄파니야 해상에서 유흥을 즐기는 일과를 즐겼습니다.
네로
네로(Nero)는 로마 제국의 5대 황제 중 하나로, 54년부터 68년까지 통치했습니다.
네로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그의 4번째 아내 아그리피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루시우스 돔이티우스 아툴루스였지만 황제가 되면서 네로 카이사르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네로의 통치는 그의 독특한 성격과 여러 가지 정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예술과 문화를 지지했으며, 그의 궁전은 엄청난 예술과 장식으로 장식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불안정하고 폭력적이었습니다.
네로는 자신의 가족과 신하들에게 무참한 학살을 저질렀으며,
그의 통치는 부패와 탐욕으로 악명을 얻었습니다.
특히 대화와 음악에 관심이 많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람들을 학살하거나 공공재를 낭비하는 등의 행동으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는 64년의 로마 대화재로,
이때 네로는 로마시민들을 지원하지 않고 자신의 궁전을 넓히기 위해 도시를 불태웠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네로는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그의 통치는 반란과 불만으로 향했습니다.
68년, 반란이 발생하자 네로는 퇴위를 강요당하고 자결했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에는 로마 제국 내에서 통치권을 차지하기 위한 민란과 투쟁이 계속되었습니다.
네로의 통치는 권력의 남용과 무참한 행동으로 기억되며,
역사에서는 그의 정치적인 결정과 논란적인 성향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네로는
절친한 친구의 아내를 취한 뒤, 친구를 포르투갈 총독으로 쫓아내고,
친구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 들입니다.
네로는, 올림픽 대회에 참가하면서 수많은 우승을 거머쥐는데, 모두가 네로 황제의 비위를 맞추느라 혼신을 다했으며, 올림픽에 참가하면서 약 5,000명 이상의 수행원을 거닐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또한, 금과 상아로 만든 배에, 고급 매춘부들을 잔뜩 태우고 유흥을 즐기며, 가끔은 낚시도 즐기는데, 사용한 그물이 막대한 재정이 투입된 "금그물"이었으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선물을 줄 때는 약 5억 원 이상의 돈을 펑펑 썼으며, 많게는 600억이 넘는 돈을 한 번에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금과 보석류로 뒤덮인 궁전을 지었으며,
그 안에는 극장, 호수, 과수원과 숲 등...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궁전의 천장은 상아로 만들어졌으며, 방문객이 향수를 뿌릴 수 있는 황금 파이프도 건설되어 있었습니다.
티투스
티투스(Titus)는 로마 제국의 황제 중 하나로, 79년부터 81년까지 통치했습니다.
티투스는 베스파시아누스와 도미티아누스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로마 제국의 10대 황제였습니다.
티투스는 그의 통치 기간이 짧았지만, 로마 제국 역사상 중요한 순간들을 겪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유다와의 유대로마 전쟁에서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신전을 파괴한 후,
티투스는 그의 부모와 함께 로마로 돌아와서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그의 통치는 대체로 선량하고 효율적이었습니다.
그는 홍수로 인한 피해를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화재로 손상을 입은 로마를 재건하는 데에도 기여했으며, 또한, 인구의 복지를 고려하여 다양한 법률을 제정했습니다.
그러나 티투스의 통치는 잠시 뒤에 공격적인 활동과 재앙으로 악명을 얻었습니다. 그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대에 정치적인 지위를 차지했던 사람들을 처형하는 등의 강경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대에 노예 봉사자들에게 사시니스트하게 대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79년 로마의 콜로세움은 그의 통치 때 완공되었으며, 개장식이 열렸는데, 이때 수많은 노예들이 투입되어 감시되었고, 그들의 안전과 인권이 간과되었다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티투스는,
그의 어머니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석방되지 않고 자신의 즉위 후 2년 만에 죽었습니다.
그의 통치는 일부 논란적인 측면이 있지만, 그의 빠른 즉위와 죽음으로 인해 그의 통치는 짧았고, 그의 아버지인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형 도미티아누스와 함께 '플라비우스 가문의 3대 황제'로 기억되기도 합니다.
티투스는 사치스러운 콜로세움 경기를 즐겼던 황제로써, 4개월 넘는 기간 동안 하루도 멈추지 않고, 경기를 열었으며, 이 기간 동안 최대 10,000명 이상의 인원들이 죽어났습니다.
원형 극장 안에 물을 가득 채워 넣은 뒤, 해전을 실시하기도 했으며, 그 당시 기술로는 물을 채워 넣기 위해서는 국고의 엄청난 자금을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미소년들을 엄청나게 불러다 놓고, 매일 연회를 즐기기를 일삼았습니다.
엘라가발루스
엘라가발루스(Elagabalus)는 로마 제국의 황제 중 하나로, 218년부터 222년까지 통치했습니다.
그의 본명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Antoninus)였지만,
황제가 되면서 엘라가발루스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엘라가발루스는 알렉산데리아 출신의 신학적인 출신으로, 신 에라히벨(Elagabal)을 숭배하는 사신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 신의 이름에서 따왔으며, 이는 태양 신이 나 동방의 신으로 여겨졌습니다.
그의 통치는 매우 부패하고 무책임한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엘라가발루스는 제국을 다스리는 데 신중하지 않았으며,
특히 그의 낭비적인 생활 방식과 부도덕한 행동으로 악명을 얻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궁전에서 호화로운 연회를 열고, 사치스럽고 낭비스러운 삶을 즐겼습니다.
또한 그의 행동은 종종 도덕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책임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불안정하고 폭력적인 면모를 보였으며, 자신의 즉위 기간에 권력의 남용과 무책임한 행동으로 비난받았습니다.
222년, 그의 부패와 무능력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군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엘라가발루스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의 즉위 기간은 짧았지만, 로마 제국의 역사에 부정적으로 남아있으며,
그의 통치는 부패와 무능으로 악명을 얻은 것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엘라가발루스는, 당대 로마 사회에서 동성애는 허용될지라도, 탑의 역할을 해야만 했는데, 엘라가발루스는 황제임에도 바텀이어서 로마인들의 지탄을 받았습니다.
평생 순결을 지켜야 했던, 여제사장을 강간했으며, 이는 극형에 처해야 할 범죄이지만, 피의자가 절대권력의 로마 황제라 처벌은 엄두조차도 못 냈습니다.
그리고,
나체의 여성이 끄는 일륜마차를 타고, 공식석상에 자주 등장했으며, 초호화 연회를 자주 열어, 그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집과 노예를 엄청나게 하사하여, 그 정도가 로마 제국의 재정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라 모두의 증오를 받았습니다.
비텔리우스
비텔리우스(Vitellius)는 로마 제국의 황제 중 하나로, 69년에 짧은 기간 동안 황제로 존재했습니다.
그는 '네르보의 비텔리우스'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네로의 무참한 자살 이후,
68년 네르보와 갈바 황제가 순차적으로 퇴위하여 로마 제국은 권력의 공백에 처했습니다.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해 69년에 네르보와 갈바 사이에서 군사적인 충돌인 '4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중 하나인 오토가 황제로 즉위하였지만,
동시에 독일 군대의 지휘관인 비텔리우스도 독자적으로 황제로 선포하고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오토와 비텔리우스 사이의 군사적 대결이 시작되었고,
오토가 패배하고 자결한 후 비텔리우스가 로마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매우 짧았고, 69년 말부터 70년 초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비텔리우스의 통치는 매우 혼돈스럽고 불안정했습니다.
그는 통치 기간 동안 과도한 낭비와 사치스러운 삶을 즐겼으며, 그의 행동은 제국 내에서 불만을 증폭시켰으며, 그는 권력을 끌고 오랜 시간 동안 살지 못했고, 69년 말에 요새에서 사람들에게 포위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비텔리우스의 통치는 로마 제국 역사에서 비교적 짧고 혼돈스러운 시기 중 하나였으며,
그의 존재는 제국의 흥망성쇠를 나타내는 사건 중 하나로 남아있습니다.
비텔리우스는,
연회마다 물고기 2천 마리, 새 7천 마리를 동시에 잡았을 정도로 엄청난 식탐을 보였으며, 그 결과 즉위 몇 달 동안 자신과 측근들의 연회ㆍ유흥 비용으로 사용한 돈이, 지금 돈으로 5,500억 원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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