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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사소한 궁금증

중국 당나라의 제3대 황제 "당 고종 (唐高宗)"

by 모모파크 2023.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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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나라의 제3대 황제 "당 고종 (唐高宗)"

 

중국 당나라의 제3대 황제 "당 고종 (唐高宗)"  

 

당 고종 이치(唐 高宗 李治, 628년 7월 21일 ~ 683년 12월 27일)은 중국 당나라의 제3대 황제입니다.

당 태종 이세민의 9남이며 이름은 이치이며, 모친은 문덕황후 장손씨이며,

자는 위선(爲善)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신라와 함께 멸망시킨 황제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당의 제3대 황제(재위 649년 ∼ 683년). 

시호는 천황대성대홍효황제(天皇大聖大弘孝皇帝)로, 줄여서 홍황제(弘皇帝)라고도 부릅니다. 

 

중국 당나라의 제3대 황제 "당 고종

 

중국 당(唐)나라 제3대 황제(재위 649∼683). 651년 영휘율령, 653년 율소를 찬정하고, 《오경정의》를 반포 발행,

당나라 초기의 전장 제도를 마무리 지었다. 후에 황후 측천 무후가 점차 권력을 잡았습니다.

 

※ 오경정의 [ 五經正義 ] 

중국 당대(唐代)의 5가지 《경서(經書)》의 관찬(官撰) 주석서(注釋書). 

 

태종의 9번째 아들로, 4세 때 진왕(晉王)으로 봉해졌으며, 

16세 때 장자승건태자(承乾太子)가 반역죄로 폐위되자, 외척(外戚) 장손(長孫) 무기(無忌)의 후원과

인효(仁孝)가 높다는 평판을 받아 형들을 제치고 황태자가 되었습니다.


655년 새로 측천무후(則天武后)를 황후로 맞아들인 뒤부터는, 여걸 무후가 점차권력을 잡았으며,

장손 무기가 살해되고 황족들도 차례로 실권을 빼앗겼으며, 33세 때병세가 심해진 뒤로는 정사(政事)가

무후에게 맡겨졌습니다.

 

한때 태산(泰山)에서봉선(封禪)을 행하고,

태종이 실패한 고구려 정복을 실현시키는 등 국세를떨쳤지만, 그 자신의 지도성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능은 건릉입니다. 

 

 

  황태자에서 황제가 되기까지  

 

태종은 어떤 의미로는 어쩔 수 없이 이치를 세운 꼴이었고, 

황태자가 된 시점에서 아직 20살도 안 된 데다 직전까지 계승 순위에서 상당히 먼 처지다 보니, 

신경을 써서 태자를 교육하게 됩니다.

 

유력한 중신들을 황태자 주변에 붙이는데, 장손무기를 태자사보, 방현령을 태부, 소우를 태보, 이적을 첨사,

이대량을 우위솔, 우지녕과 고계보를 우서자, 장행성을 소첨사, 저수량을 빈객으로 삼습니다.

 

태반이 공신들이자 재상급인 인재들을 황태자 주변에 붙임으로써

그 지위가 굳건하다는 것을 대내외에 드러내 보인 것입니다.

 

여기에 자신과 항상 동행하게 하면서 국정에 관해 의견을 말하게 하였고,

자신의 통치 경험을 《제범》이란 책으로 엮어서 학습시키게 하는 등

황제 속성 교육을 시켜 자신의 사후를 대비하게 한다. 또한 이 시기에 고종이 측천무후와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태종은 사망시에 장손무기와 저수량을 불러 고명대신으로 삼고 유언으로

"장손무기와 저수량이 있으면 너는 천하를 걱정하지 말라." 하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그렇게 속성 교육을 했다지만 당 고종이 여전히 못 미더웠던 모양입니다.

 

 

  황제로서의 치세  

 

의외의 정복군주

649년에 즉위한 고종은 아버지에 비하면 별로라는 평이 대체적이지만,

그래도 나라를 잘 꾸려나간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측천무후를 후원해 그녀가 국정에 참여하고

공신들을 숙청하며 실권을 잡는데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는 점에서는 좀 까이기도 했습니다.

 

 

  황후 폐위와 새 황후 책봉  

 

고종은 기존의 황태자비였던 왕씨를 황후로 올리나 곧 관계가 소원해지고, 숙비 소씨를 총애하게 됩니다.

이에 황후 왕씨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폐위하려 하나 내로라하는 명문 집안이었던,

황후 왕씨를 장손무기, 저수량을 비롯한 좌명대신들이 옹호하여 분쟁이 심각해집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고종은

감업사에 자주 들러 관례대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 무미랑(후의 측천무후)를

총애하게 되었고, 652년 결국 무미랑에게서 아들 이홍을 얻습니다.

 

그리고 653년 황후 왕씨와 숙비 소씨의 대립이 극한에 치닫으며,

황후 왕씨는 숙비 소씨에 대한 고종의 총애가 멀어지게끔 하기 위해

무미랑(후의 측천무후)을 다시 황궁에 들여 정2품 소의(昭儀)에 책봉하도록 합니다. 

 

처음에는 황후의 생각대로 고종의 총애가 숙비 소씨에게서 멀어졌지만,

소의 무씨가 고종을 독점하게 되면서 상황은 급변하여, 황후는 소의 무씨의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소의 무씨는 황후와 숙비 소씨에게서 배척을 받는 후궁들과 빈천한 가문 출신의 서족들,

장손무기 및 저수량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적까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세력을 구축했으며,

결국 치열한 정치 투쟁 끝에 소의 무씨의 딸 안정공주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공신들의 수장 격이던 저수량과 장손무기가 강등되고,

황후 왕씨와 숙비 소씨가 폐서인되어 자결함으로써 무씨가 황후로 책봉됩니다.

 

직후 무후는 황태자(皇太子)였던 이충(李忠, 643년 ~ 664년)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맏이인 이홍을 황태자 자리에 올립니다.

 

 

중국의 4대 악녀

1. 은의 달기 ​ [주지육림]의 주인공 달기 주 왕과 달기: 중국에는 4대 악녀와 4대 미녀가 있다고 하는데 ‘달기’는 그 4대 악녀 중 한 사람이다. ​ ‘달기’에 관한 기본 사료로서는 《사기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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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황후 폐위와 책봉 과정은 

표면상으로는 측천무후의 미모에 홀린 고종의 잘못된 행동이라 평을 받고 있지만, 

속내는 전통적으로 정권을 잡고 있던 관롱 귀족(사족) 세력과 이들에게 차별 대우를 받고 있던 

서족 세력의 정치 투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며, 

측천무후의 승리는 관롱 귀족 집단의 정치적 패배와 몰락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장면들을 주도한 인물은 측천무후가 아니라 고종 자신이라는 것이 최근의 중평입니다.

실제로 측천무후에게는 어느 정도 용인이 되었지만

선황 태종의 측실로 이미 출가했다가 환궁했다는 약점도 존재했고,

고작해야 당대에 출세한 개국공신이 전부인, 격이 턱없이 낮은 가문이라는 한계가 존재했습니다.

 

때문에 측천무후는

고종의 총애를 제외한 지지 기반이 전혀 없었으므로 황실 내에서 자기 기반 다지기에도 급급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무천진 군벌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벌여서 승리했다면 정치의 신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지만, 그럴 가능성보다는 고종의 심중을 대행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대외 정책  

 

고종은 태종의 뒤를 이어 팽창주의적, 공격적 대외 정책을 추구했습니다. 

측천무후의 포스 때문인지 공처가의 이미지도 강하고 병약했다는 점 때문에 

소극적인 대외 정책을 추구했을 것 같지만, 

실상은 상당히 호전적인 전쟁광이란 생각마저 들 정도로 전쟁을 많이 했습니다. 

 

이러한 전쟁은 동쪽에서는 신라와 손을 잡고 아버지 당 태종이 정복에 실패했던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등의 

성과를 냈지만 나당전쟁에서 패해 목적한 바를 완전히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한반도에 국력을 집중하느라 서쪽 토번의 가르친링의 성장을 제때 견제하지 못해 

수도 장안에서 가까운 지역까지 위협받는 처지가 됩니다.

 

애초에 토번은 당이 키운 감이 없지 않은데 토번을 제때에 견제했다면 초기에 몰락시킬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으니 골치거리를 남기게 된 셈입니다.

 

돌궐과의 전쟁

고종은 즉위 직후부터 돌궐 세력과 지속적인 전쟁을 벌입니다.

태종에 의해 몰락했던 동돌궐은 설연타의 패망으로 인한 공백을 노려 거비가한이 재기를 노렸고,

세력을 유지하던 서돌궐은 이를 후원하면서 기회를 노리지만,

 

그러나 즉위 직후인 650년, 우효위랑장 고간이 거비가한을 추적, 생포한 다음 그 부족을 욱독군산에 이주,

관리하여 동돌궐의 재기를 늦추며, 이후 657년 좌둔위장군 소정방은 전격적인 진공 작전을 펼쳐

서돌궐의 사발라가한 아사나하로를 공격, 서돌궐을 평정하는데 성공합니다.

 

 

 

당고조ㆍ당태종은 중국 사람이 아니었다?

당고조, 당태종은 중국 사람이 아니었다 당 고조 唐 高祖 | 566∼635, 재위 618~626) : 당나라 제1대 초대 황제 자는 숙덕(叔德)이고 묘호는 고조이다. 서위(西魏)․북주(北周)시대에 활약한 이호(李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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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를 멸망시키다

당은 667년 1월,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 북쪽의 신성을 비롯, 그 휘하의 16개성을 함락시키고

국내성에 웅거한 남생과의 연결선을 확보했으며, 668년 2월에는 부여성과 휘하의 40여개의 성을 함락시켜

후방을 안정화시킵니다.

 

그리고 그해 8월 평양성을 포위하였고 신라와의 협공으로 9월 21일 마침내 평양성을 함락하고

보장왕에게 항복을 받으며, 이로써 고구려는 건국 705년 만에 멸망했습니다.

 

나당전쟁

그러나 대고구려 전쟁이 끝나자 고종은 신라 또한 장악하고자 시도합니다.

백제 영역에는 웅진도독부를, 고구려 영역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신라를 계림도독부로 명명하면서

자국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려 한 것인데, 그러나 신라는 이전부터 당나라에 대한 불만을 갖고,

당의 야욕을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결국 신라군이 검모잠, 안승이 이끄는 고구려부흥운동 세력과 힘을 합쳐,

요동과 웅진도독부를 선제공격하면서 나당전쟁이 일어납니다. 

 

전쟁은 7년여에 걸처 이어졌으며,

결국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 등 중요한 교전에서 신라군에게 패배,

당고종은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를 한반도 바깥 북쪽으로 철수시켜 사실상 나당전쟁을 포기했습니다.

이후 양국은 장기간에 걸처 관계가 사실상 단절되다시피 했다가 당 현종 때에 관계가 복구됩니다.

 

 

토번과의 전쟁

고종은 토번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도 실패만 맛보게 됩니다.

이는 이 시기에 가르친링이 토번의 실권을 잡으며 등장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토번에 대해 이이제이의 용도로 이용하며 당태종 이래 부용 세력으로 유지하고 있던 토욕혼을

663년 대파, 장악한 후 안서 4진을 공격해 함락한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고종은 설인귀를 대총관으로, 아사나도진, 곽대봉을 부사령관으로 삼아 10만의 군대를 편성해

670년 공격에 나서게 했지만 가르친링에게 대비천 전투에서 완파당해 장군들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돌아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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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토번은 남쪽으로는 파라문, 서쪽으로는 총령, 북으로는 돌궐에 이르며 '1만여 리가 되는'

강역을 지배하에 두었고, 기나긴 국경선을 치고 빠지며 당나라를 괴롭혔습니다.

 

679년 이경현, 유심례는 재차 10여만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토번을 공격하지만

이 또한 참패, 유심례는 사로잡히고 이경현만 간신히 귀환합니다.

 

당나라는 이에 토번에 대한 대책에 골몰하지만,

공격하기는 어렵고 방어하기는 쉬운 티베트 고원으로 쳐들어가기도 무리고

딱히 대응할 방도가 없어 각지의 방어를 견고히 하는 소극적 정책만을 수행하게 됩니다.

 

 

  측천무후의 국정 개입과 장악  

 

고종은 집권 초에는 상당히 의욕적으로 정치를 수행했으나 660년 이후부터는 자주 병치레를 하게 되면서 

측천무후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고, 정치적으로 많이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고종의 신임에 의해 정치적인 힘도 얻게 된 무후는 

아직 힘이 남아있던 장손무기, 한원, 유석, 우지녕 등을 죽였으며, 

 

이후 자신의 반대파였던 재상 상관의도 664년, 

이전의 황태자였던 이충과 짜고 반역을 일으키려 했다고 몰아 처형했습니다. 

 

고종이 무후를 폐위하기 위해 칙서를 내린 것이 들통나 무후가 고종에게 가서 따졌고, 

고종이 상관의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고도 합니다.

이 때문에 당시 고종의 권력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라는 게 세간의 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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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종은 병이 나아지면 직접 국정을 수행하기도 했고,

이 시기 무후의 정치력은 기본적으로 고종의 신임에 근거한 것이었기 때문에

딱히 고종의 권력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폐위 운운도 권한이 강해지는 무후에 대한 단순 견제에 가깝다고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건강 상태는 레알이었기 때문에 고종이 쓰러지고 무후까지 폐위되면

당 황실은 사실상 공황 상태가 되어버릴 지경이었습니다.

 

이후 무후는 자신이 너무 지나쳤다는 등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고종의 신임을 회복했고,

황태자로 앉힌 장남 이홍이 675년 병으로 죽자, 둘째 이현(李賢)을 황태자로 세웠다가,

680년에 어머니의 숙청에 불만을 품자 폐위하고, 셋째 이현(李顯)을 황태자로 세웠습니다.

 

674년 고종은 병세가 심해져 더이상 정사를 돌보기 힘들게 되자

자신은 천황, 무후는 천후로 칭해 공동 정부의 구도를 형성시켰고,

675년 장남 이홍이 죽자 무후에게 수렴청정을 맡기면서 사실상 정권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심지어 고종은 무후에게 제위를 넘기려고까지 했다가 재상 학처준의 반대로 이를 취소한 적도 있었습니다.

 

 

  사후의 혼란  

 

고종이 죽자, 황태자 이현이 중종으로 제위에 올랐으나 

중종의 황후 위씨와 그녀의 아버지 위현정이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무후는 중종을 내쫓고, 그녀의 넷째 아들 이단, 즉 예종을 즉위시켰습니다. 

 

이후 계속해서 일어난 반대파들의 저항과 반란을 진압하고 무후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으며,

690년, 측천무후는 예종도 몰아내고 드디어 제위에 올라 주나라를 세웠습니다. 

 

무후는 나라를 매우 잘 다스렸다지만 그거야 백성들 사정이고, 당 황실은 이후에도 위황후, 안락공주,

태평공주 등의 음험한 권력투쟁으로 당현종(이융기)이 즉위할 때까지 몸살을 앓았습니다.

 

이렇게 된 계기가 측천무후에게 있다고 보는지, 측천무후는 잔인하다는 등

'안 좋은 평가'와 뛰어난 통치자라는 등 '좋은 평가'가 함께 나옵니다.

 

※  측천무후 참고하셔서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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