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 First Sino-Japanese War, 淸日戰爭 ]
1894년 6월∼1895년 4월 사이에 청(淸)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다툰 전쟁.
Between June 1894 and April 1895, the Qing Dynasty and Japan fought for control of Joseon.
타이완 사건
일본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성공시킨 이후 근대화를 이루며, 제국주의적 대외진출을 도모하였습니다.
1871년에는 청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화친관계를 맺었지만,
하지만 아시아에서의 패권을 두고 대립하던 청·일 양국간의 분쟁은 계속 발생하였습니다.
일본은 1874년 류큐인(琉球人)이 타이완인(臺灣人)에 의해 살상된 것을 계기로,
타이완에 출병하여 청의 간섭을 받지 않고 일본의 세력권하에 두게 되었으며,
그 후 1879년에는 종래 청·일 양국이 종주권을 주장해 오던 류큐를 병합하여
오키나와현(沖繩縣)을 설치하였고, 중국의 용인을 받아냈습니다.
조선에서 패권 다툼보다 큰 분쟁은 조선(朝鮮)문제를 둘러싼 양국간의 세력 다툼이었습니다.
일본은 유신 직후 청국의 간섭을 배제한 채 조선과 수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1876),
부산·인천·원산을 개항시켰습니다.
한편, 청은 일본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으로 하여금 서양 각국과도 조약을 맺도록 조언하였습니다.
조선에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출병하여 적극적인 개입으로 조선에서 주도권을 잡았고,
1884년에도 조선에서 일본의 지원을 받은 개화파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키자,
청나라 군사는 이를 3일만에 진압하였습니다.
두 사건에서 청나라가 우세하고 일본이 약세를 보이자, 일본은 이를 만회하기 위한 전략을 추진하였으며,
다음 해 청·일 양국은 톈진조약[天津條約]을 체결하여, 양국 군대의 철수를 약속하고
이후 한국에 출병할 때는 상호 통고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청국과 일본의 군대는 조선으로부터 철수하였으나,
청은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조선에 상주시키고 조선의 내치·외교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고,
경제적으로도 청국의 진출이 크게 향상되는 등, 청은 조선에서의 패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도 경공업 등이 발달하여 조선 시장에 크게 진출하게 되어,
조선은 청·일의 경제대립의 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던차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이 발생하였습니다.
위기에 처한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양력 6월에 청나라가 파병하자 일본도 톈진조약에 근거하여
동시에 조선에 파병함으로써 세력 만회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된 이후에도 일본은 철병(撤兵)을 거부하고 오히려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드러내어,
조선내 개혁(갑오개혁)을 강요하고, 동시에 조·청간에 맺은 통상무역장정(通商貿易章程)을 폐기하라고
요구하며 내정을 간섭하는 등 지배권 확보를 도모하였습니다.
풍도해전
일본은 경부간 전선(電線)을 가설하여 전쟁에 대비하는 듯 하더니,
6월 21일에는 병력을 동원하여 왕궁과 4대문을 장악하였습니다.
한편, 조선 정부는 일본의 강요로 청나라와의 통상무역장정을 폐기한다고 발표함으로써,
조-청간의 국교를 단절시키고, 일본군은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은 것처럼 위장하여
아산만에 주둔중인 청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산만 앞바다에 있는 풍도(豊島)에서는
청의 육군을 싣고 오는 청의 함정을 일본군이 습격하여 참패시키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청나라 군사 1,200여명이 익사하였지만,
이미 청·일 두 나라 군대가 조선내에서 충돌한 것입니다(1894. 6. 23/양 7. 25, 새벽).
이어서 성환(成歡)에서도 두 나라 군대가 충돌하여 일본군이 압승하였습니다.
이 마당에 양국은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하고 이제야 전면전으로 돌입하게 되었습니다(7. 1/양 8. 1).
리홍장의 북양해군 괴멸
그 후 평양 전투에서도 역시 일본이 승리하였으며 압록강 어귀에서 벌어진 해전에서도 청군이 패주하였으며,
일본은 랴오둥 반도의 뤼순[旅順]을 함락하였습니다.
일본 해군은 우세한 전력으로 연승하며, 산둥반도의 웨이하이웨이[威海衛]까지 점령한 후,
최후로 유공도(劉公島)의 함대를 격파하여, 결국 북양함대(北洋艦隊)는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청나라 북양수사제독(北洋水師提督) 정여창(丁汝昌)은
항복문서와 함께 모든 군사물자를 일본에 양도하고 자결하였습니다.
일본군은 랴오둥반도·발해(보하이이)만·산둥반도를 장악하고, 북경·톈진을 위협하였습니다.
남쪽에서는 펑후섬[澎湖島]을 점령하고, 끝내는 청국 전체를 정복할 기세였습니다.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이럴 즈음 영국과 러시아 등이 중재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들을 모두 거절하고, 국제적으로 중립적으로 보이는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여,
결국 일본과 청국은 1895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당시는 馬關)을 체결하여
전쟁의 뒤처리를 하였습니다.
일본은 승전 대가로 거액(청나라 1년 예산의 2.5배)의 배상금과 중국의 영토인 랴오둥반도[遼東半島],
타이완[臺灣], 펑후섬을 할양받았습니다.
그러나 만주로의 진출을 꾀하는 러시아는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장악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이 이에 간섭하여(삼국간섭) 랴오둥반도를 중국에 반환토록 압박하였습니다.
힘의 열세를 느낀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반환하였고,
러시아에 대한 불만은 심화되어 새로운 어두운 역사를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청일전쟁 결과
전쟁을 사전에 철저히 준비한 일본은
전쟁준비에 무성의하고 부패한 청나라를 상대로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그 동안의 동양 패권을 중국으로부터 일본이 넘겨받는 계기가 되었고,
그 후 조선 등 대륙으로의 침략을 한층 강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일본은 국내의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며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패전한 중국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더욱 받게 되는 불운을 겪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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