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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자 장군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영어단어 시저(Caesar)는
독일에서는 카이저(kaiser), 러시아에서는 차르(czar) 라고 하지만 모두 황제를 뜻하는 말입니다.
황제 중에서도 실권을 장악하고 마음껏 휘두르는 전제군주나 독재자에게 이러한 호칭을 붙입니다.
이 절대적인 힘을 가진 황제를 뜻하는 시저라는 단어는 실은 로마의 정치가였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각국에서 다르게 발음되며 모두 황제를 가리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황제가 아니었습니다.
배경 - 안정기의 공화정 로마
기원전 616년에 촌락 같은 작은 도시에서 출발한 로마는 에트루리아인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에트루리아인은 약 100년간 로마를 지배했는데, 기원전 510년에 로마인이 반란을 일으켜,
치열한 전쟁 끝에 에트루리아인 왕을 추방했습니다.
이 시기에 시민의 대표자들이 만든 '원로원'이 정무의 최고 명령권을 갖고 집정관(執政官)
두 사람을 선출하는 로마 공화정 체제가 구축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왕정(王政) 타파를 자랑스러워했고, 전투에 대한 얘기는 전설처럼 전해졌으며
로마인들은 전제주의(專制主義)의 잔재가 남아 있는 사람들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공화정 로마는 착실히 힘을 키워 적들을 제거해 나갔으며, 카이사르가 탄생한 기원전 100년의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승자였지만 내외부적으로 주변에 많은 적들이 있었습니다.
카이사르가 탄생했을 무렵에
평민 출신의 장군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로마의 최고위 공직인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기원전 115년에 법무관 선거에 당선된 마리우스는
카이사르의 고모 율리아와 결혼했으므로 카이사르에게는 고모부가 됩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
그의 부하 장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와 술라는 카이사르의 소년기를 격동으로 물들인 인물입니다.
특히 술라는 사후(死後)에도 카이사르의 적으로서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태생 - 율리우스 일가
영어로 줄리어스 시저라 불리는 시저의 정식 라틴어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서
가이우스는 남자에게 흔히 붙이는 명칭이었습니다.
율리우스는 가문, 카이사르는 가명(家名)에 해당합니다.
가이우스라는 이름은 세습되기 때문에
여기서 설명하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버지도 이름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입니다.
잔혹한 독재정치로 악명 높던 로마의 제3대 제왕 카라칼라도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입니다.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는 현재의 로마보다 내륙에 있던 알바 왕국의 왕족 혈통인데,
율리우스 일가는 이 왕국의 유력자로서 명문 귀족이었으며,
카이사르가(家)는 율리우스 일문의 직계라고 할 수는 없고 비교적 후대의 가명(家名)입니다.
카이사르 가문은 가이우스라는 이름을 세습하는 가족과, 루키우스라는 가족으로 나뉘게 됩니다.
카이사르의 아버지는 법무관이었습니다.
법무관은 집정관 다음가는 공직이지만, 가이우스가의 힘으로는 최고위직 집정관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이처럼 가이우스 집안은 같은 가문인 루키우스 집안에 비해 힘이 약했는데,
정략 결혼으로 그럭저럭 명문 귀족의 체면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친정은 출세한 사람이 많은 명문이며,
학자 집안이라 그녀도 상당히 교양 있는 여성이요 보기 드문 현모(賢母)였습니다.
군사쿠데타 - 집정관에 의한 수도 제압
집정관이 된 마리우스는 우선 시민군이던 로마군(軍)을 직업군인 기구로 개편하는 군정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 당시까지 로마군은 징병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패배를 모르는 장군으로서 영광을 누렸던 마리우스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위세가 점차 떨어지고 있었는데, 병역 의무에서 시민들을 해방하고 실업자들에게
군인이라는 직업을 주어 로마 서민층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게다가 휘하의 군대를 지휘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마리우스의 새로운 비약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하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마리우스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마리우스와 술라는 원정의 지휘권을 놓고 싸웠는데, 오리엔트(소아시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에 대한 원정 지휘권을 마리우스가 수중에 넣어 당초 총사령관에 선출되었던 술라가 이를 찬성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원전 88년에 집정관에 임명된 술라는 이 해에 캄파니아의 노라에 주둔한 군대를 움직여 수도 로마로 진군했다. 집정관이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진군한다는 것은 로마인들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비난을 퍼부었으나 술라의 군대는 시민들을 학살하고, 일부에서는 불을 질러 약탈행위를 자행하기도 했다. 수도는 몇 시간 만에 제압되었고 마리우스는 로마에서 도망쳤다.
유혈 - 마리우스의 복수와 술라의 공포정치
군사 쿠데타로 오리엔트 원정의 지휘관으로 복귀한 술라는
오리엔트를 평정하고 그리스까지 진군해 그리스 전역을 항복시켰습니다.
술라가 없는 로마(기원전 89~84)에서는 집정관 루키우스 킨나가 마리우스파(派)임을 표명하고
원로원의 다수파를 장악하여 기원전 87년에 도망 다니던 마리우스를 불러들였습니다.
그 무렵 아프리카에 있던 마리우스는 병력 6천 명을 이끌고 로마로 귀환하여 두 번째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분노에 찬 마리우스는 원로원 의원 50명, 기사계급 1천 명을 순식간에 학살했고
희생자들 중에는 집정관이었던 옥타비우스도 끼여 있었습니다.
옥타비우스의 죽음은 집정관이 같은 로마인에게 죽음을 당한 첫 번째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카이사르의 큰아버지가 두 사람이나 희생되었으며,
마리우스도 또한 카이사르의 친척이었기 때문에 아직 열세 살인 소년 카이사르에게 충격은 매우 컸습니다.
카이사르가 처음으로 목격한 '유혈의 복수전'이었던 것입니다.
복수는 대학살로 끝이 났고
이듬해에 마리우스는 킨나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지만 임기를 시작한 지 13일 만에 열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마리우스의 후계자임을 자인하는 집정관 킨나는 점차 서민들의 호응을 얻게 되었고, 정권은 '민중파'가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카이사르는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였다. 마리우스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원로원파' 사람들이 술라의 진영으로 망명하는 가운데, 집정관 킨나는 머지않아 로마로 돌아올 술라에 대비하여 방위군을 정비했다. 하지만 킨나는 군대 편성의 혼란에 휩싸여 목숨을 잃고 만다.
기원전 84년, 드디어 술라가 로마 귀환을 시도하고 2년에 걸친 내전이 벌어지며,
카이사르의 소년 시절도 끝이 났습니다.
로마 귀족 가문의 청년
카이사르라고 하면 대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가리키고 있기는 하지만
가이우스가 개인의 이름이고 카이사르는 가문명, 율리우스는 카이사르 가문이 속한 씨족명입니다.
카이사르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미의 여신 베누스(비너스)의 자손을 자칭하는 유서깊은 귀족 가문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그다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의 외가 쪽이 로마 귀족사회에 큰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카이사르의 고모부가 되는 평민 출신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카이사르의 정치적 멘토 역할을 하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한 사람이 다스리는 황제 국가가 아니라 귀족과 일부 민중대표(호민관)가 정치를 이끌어가던 공화정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술라가 죽은 후 로마로 돌아왔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그의 정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삼두정치로 집정관에 오르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청년시절 받은 좋은 교육과 로마 밖을 떠돌며 얻은 경험,
그리고 타고난 언변과 매력적인 외모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결혼하면서 술라파의 지지까지 얻은 카이사르는 승승장구 로마의 고위관직들을 섭렵해나갔으며,
고모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영향 탓인지 카이사르는 민심을 파악하는 능력이 출중하였으며
민중과 친근한 입장에서 정책들을 내놓아 인기몰이를 하였습니다.
또한 로마 속주에 근무할 때는
주변국과의 전투에서 차근차근 그 전과를 쌓아 나가 안팎으로 대정치가로 가는 발판을 닦았습니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최고위직인 집정관(콘술)에 오를 것을 희망했지만,
카이사르의 힘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원로원은 그가 집정관이 되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당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한 성과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던
크라우스,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고 원로원의 방해를 이기고 집정관에 당선되었습니다.
이를 1차 삼두정치라고 합니다.
카이사르는 삼두정치의 실현을 위해 폼페이우스와 거래를 하였으며,
그의 외동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켰습니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도움으로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는
국유지분배법안을 비롯한 각종 법안을 제출하여 민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지지를 얻어 집정관에 오른 또 한명의 집정관 비불루스를 무력화시키고
퇴역군인과 민중들을 중심으로 한 갖가지 정책들을 실현해 나갔습니다.
카이사르의 독주는 키케로와 카토 등 공화정을 지지하는 귀족들의 불안을 초래하였으며,
귀족세력과 카이사르의 갈등은 평생을 두고 계속되었습니다.
갈리아 정복과 카이사르의 성장
집정관을 역임한 후 카이사르는 로마의 속주였던 일부 갈리아 지역(프랑스 남부지역)의 총독이 되어
갈리아 지역 전체를 정복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갈리아 지역은 현재 북부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
그리고 라인 강 서쪽의 독일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으로 켈트족이 광범위하게 부족사회를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총 7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갈리아 정복으로 켈트족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잃어버리고 급속도로 로마화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일부 켈트족들은 카이사르의 군대에 맞섰지만
대부분의 켈트족들은 선진적인 로마 문명에 적극적으로 동화되어갔습니다.
갈리아에서의 승승장구로 카이사르는 로마 원로원 귀족들로부터 더욱 경계를 받았습니다.
협의롤 통해 로마 정치를 이끌어가던 귀족들은 카이사르의 독주가 장차 귀족권을 약화시키고
1인 독재의 시대를 불러 올 것이라 우려하였으며,
키케로와 카토 등 공화정을 지지하던 귀족들이 본격적으로 카이사르를 견제하려고 나섰습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유명한 말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뜻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이즈음 삼두정치를 이끌던 크라수스가 파르티아(현재 이란 북동부지역)와의 전쟁 중에 전사하고
폼페이우스와 결혼했던 카이사르의 외동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습니다.
카이사르,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3명이 이끌던 삼두정치가 붕괴될 조짐을 보이자,
로마 귀족들이 먼저 손을 쓰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폼페이우스를 자기편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였습니다.
혼인으로 이루어진 인척 관계가 끊어지자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결별하고 귀족 세력과 손을 잡았습니다.
원로원의 귀족들은 카이사르에게 즉시 군대를 해산하고 갈리아 총독에서 물러나 단신으로
로마로 돌아올 것을 명령하였고, 카이사르에게 무장해제하고 죽으러 오라는 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몇 차례 귀족들과 협상을 하려했지만, 폼페이우스의 군사력을 믿고 있던 귀족들은 이를 무시했다.
이 와중에 카이사르의 편을 들던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가 있는 갈리아로 도망쳐옵니다.
카이사르는 협상의 테이블은 이미 깨졌다는 것을 직감하고 내전을 불사하기로 합니다.
그는 갈리아에서 단련된 자신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으며,
갈리아에서 로마로 들어가는 루비콘 강을 건너며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사들 앞에서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이 말은 내전만은 피해보려 했던 카이사르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후 마지막 결단이 로마 진격이었던 것이고
그 결단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명백히 한 것입니다.
카이사르 군대의 재빠른 움직임에 로마귀족들과 폼페이우스는 당황했으며,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건너가 훗날을 도모하지만 피난 중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로 건너가게 되고 그곳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납니다.
클레오파트라 7세와의 만남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로 건너가 훗날을 도모하려 했던 것은
그를 지지했던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이미 전세가 카이사르 쪽으로 기운 것을 보고 폼페이우스를 배신했으며,
폼페이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부하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이집트로 건너와 정적이긴 하지만 옛 친구이자 한때는
사위이기도 했던 폼페이우스의 시신을 본 카이사르는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권력을 다투던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손을 잡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내쫓고 그녀가 권력을 독점하도록 도왔으며,
그 와중에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사랑을 나누게 되고 둘 사이에는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로마와 이집트의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왕이 되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꿈은 카이사르의 죽음과 함께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적이 사라지고 귀족권이 약해진 로마는 카이사르 1인 천하가 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집정관 자리에 안토니우스를 앉히고 자신은 그 위의 종신 독재관 자리를 차지하였고,
집정관은 명목일 뿐 로마의 정치는 이제 카이사르 1인의 손에 의해 좌우되었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은 카이사르였지만 그는 황제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전 시대 귀족들이
각자의 이권에 따라 이합집산하면서 정체되곤 했던 개혁들을 하나 하나 밀어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달력을 개정하고 통화를 개혁했으며
시민권을 확대하고 사법개혁, 복지정책 실시, 식민지정책, 건설 사업 등
그 자신이 다방면에서 탁월한 인재였던 만큼 카이사르는 사회 각 방면에 새로운 정치를 펼쳐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카이사르의 정치는 귀족 중심의 공화정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대제국 로마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브루투스 너마저
그러나 1인 독재에 대한 귀족세력의 불만은 완전히 잠재울 수 없었습니다.
카이사르가 황제가 되려 한다는 불안이 귀족 전체에 번지면서
카이사르의 독주를 막으려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습니다.
카이사르의 애인 세르빌리아의 아들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폼페이우스파였다가
카이사르파로 돌아선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주도가 되어 카이사르의 암살 계획이 세워졌습니다.
이 계획에는 카이사르가 총애하던 데시무스 브루투스도 끼어 있었습니다.
카이사르 운명의 날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장으로 들어가는 회랑 앞에서 14명의 귀족들에게 둘러싸였습니다.
그들은 옷섶에 숨겨두었던 단도를 꺼내 무차별적으로 카이사르를 찔렀으며,
카이사르는 총 23곳에 상처를 입고 토가자락을 휘어감은 채 쓰러졌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쓰러진 장소는 그의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의 동상 앞이었습니다.
쓰러지기 직전 카이사르는 암살 귀족들 사이에서 총애하였던 두 명의 브루투스를 보았으며,
죽기 직전 그는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신음을 뱉었습니다.
카이사르가 말한 브루투스는
두 명의 브루투스 중 데시무스 브루투스였을 것이라는 것이 후세 학자들의 추측입니다.
카이사르가 죽은 후 공개된 유언장에서 데시무스 브루투스가
옥타비아누스에 이어 2번째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추측을 합니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본 데시무스 브루투스는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고개를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민중의 분노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그동안 그를 지지했던 민중의 분노는 거셌으며,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암살이 정당하다고 주장했지만 성난 민중들에게 공격당했습니다.
암살파와 카이사르파는 종신독재관을 제외하고는 카이사르의 유지를 그대로 받들기로 합의하였고,
카이사르는 화장되었는데, 그의 유해는 때마침 내린 비에 모두 씻겨 내려가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카이사르는 무덤조차 없습니다.
이후 로마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의 제2차 삼두정치가 성립하게 되고
암살파들과의 내전에 돌입하였습니다.
키케로, 브루투스 등 암살파가 모두 제거된 이후에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패권을 놓고 내전을 벌였습니다.
카이사르가 마련한 1인 독재 정치는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정권을 획득한 후 초대 황제가 됨으로써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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