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 군함같이 생겼다고 불리는 군함도
ㆍ 일본 나가사키현 하시마에 있는 탄광
ㆍ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되어 노동력을 수탈당했던 곳
"군함도"라 불리는 일본의 섬 "하시마 탄광"
하시마(端島)는 일본 나가사키(長崎)항에서 18km 떨어진, 남북 480m, 동서 160m의 작은 섬으로,
섬의 모양이 군함을 닮았다고 해서 군함도로 불리기도 합니다.
일본 침략전쟁 당시 조선인 징용자들이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등
주변국들에겐 침략 피해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대표적 전범기업인 미쓰비시가 1890년 사들여 해저탄광을 개발했는데,
이 탄광은 지하 1km가 넘는 해저 탄광이었습니다.
탄광 안은 좁고 온도가 45도를 넘었고 유독가스가 수시로 분출되기도 하며,
작업 도중 해수가 갱내로 쏟아져 들어오기도 하는 등
혹독한 자연환경과 노동조건 탓에 ‘감옥섬’, ‘지옥섬’으로 불렸습니다.
하시마 섬은 처음부터 석탄을 채취하기 위해 개발됐었습니다.
섬이 군함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군함도라고도 불리기도 합니다.
하시마 탄광은 지하 1km가 넘는 해저 탄광이며,
일제강점기 때 강제 동원된 800여명의 조선인들은 이곳에서 배고픔과 위험 속에서
하루 12시간 동안 채탄 작업에 시달렸습니다.
이중 질병, 익사, 탄광 사고 등으로 확인된 사망자만 122명에 달하며,
2015년 7월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이 신청한 하시마 탄광 등
23개 근대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를 최종 결정했고 한국 등 주변국들은 반발했습니다.
하시마에서 석탄이 처음 발견된 때는 하시마에서 약 4.5km 떨어진 섬 다카시마보다 90여년 늦은
1810년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시마 석탄 개발은 다카시마탄전 개발의 연장선에서 이뤄졌습니다.
1920년대 후반부터 하시마에서는 연 20만톤대의 석탄이 생산됐어습니다.
그 후 시설을 확충하고 발전을 거듭해 1941년에는 41만1100톤을 생산했으며,
하시마 탄광 최고의 생산량이었습니다.
이후 차츰 생산량이 저하됐고, 연료를 석유로 바꾸는 이른바 '에너지 혁명'으로
석탄 산업의 불황이 이어지자 결국 1974년 1월15일 폐광했습니다.
폐광 이후 하시마 출입은 오랫동안 금지됐다가 일본 정부는
'귀중한 해저탄광 유적', '일본 근대화의 상징' 등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며
2009년부터 관광지로 개발해 활용하고 있습니다.
하시마 탄광에 조선인이 유입된 것은 1917년경으로 추정되며,
이후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동원된 조선인의 수는 해마다 늘었습니다.
당시 강제 동원된 수백 명의 조선인들은 비인간적 환경에서 고통을 겪었는데,
특히 외부와도 철저히 격리된 채 하루 12시간 이상의 고된 노동으로 122명이 숨졌다는 보고서가 있습니다.
특히 하시마에 동원된 조선인 중 일부는 1945년 8월 인근 나가사키에 미군의 원자폭탄이 투하됐을 때
시내 복구작업에 투입돼 방사능에 노출되기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시마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
하시마 탄광은 지하 1km가 넘는 해저 탄광입니다.
탄광 안은 좁고 온도가 45도를 넘었고 유독가스가 수시로 분출되기도 했습니다.
작업 도중 해수가 갱내로 쏟아져 들어오기도 했으며, 육지 탄광에 비해 채굴조건이 매우 나빴습니다.
조선인들은 일제의 석탄 증산요구에 따라 배고픔에 속에서 하루 12시간 동안 채탄 작업에 시달렸으며,
이같은 혹독한 자연환경과 노동조건 탓에 '감옥섬'으로 불렸습니다.
하시마 탄광에서 조선인 노동자의 존재가 처음 확인된 것은 1917년입니다.
개발사인 미쓰비시는 탄광노동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 각지는 물론 조선인도 모집했습니다.
1918년 하시마에서 941명이 갱내부에서 광부로 일했고, 이중 70명(7.4%)이 조선인이었습니다.
1935년 3월26일 하시마 탄광의 갱내 가스 폭발로 20명 이상의 광부가 사망한 큰 사고가 발생했으며,
출신지가 공개된 사망자 17명 중 조선인 노동자는 절반이 넘는 9명이었습니다.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총동원체제를 가동하면서
하시마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의 수도 해마다 늘어 패전 직전인 1944년 800여명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비인간적 환경에서 고통을 겪었으며,
외부와도 철저히 격리된 채 고된 노동과 열악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122명이 숨졌습니다.
사망 원인은 악조건 속에서 제대로 먹지 못하며 장시간 노동을 해 영양부족 때문에 생겼을 것으로 보이는 질병,
도망치다 바다에 빠진 것으로 추정되는 익사, 그리고 질식·탄광사고 등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생존자들은 “갱도 안은 서지 못할 정도로 좁고 온도가 45도를 넘었습니다.
노역 중 돌이 떨어져 머리가 찢어지거나 이따금 떨어진 돌에 맞아 사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루 12시간씩 일하면서 쉴 시간은 몇 분 주지 않고, 심하게 매질을 할 때가 많았다",
"탄광이 무너지는 사고가 잦아 죽는 사람이 많았다."
"많은 사람이 도망가려 했지만 대부분 잡혀와 심한 고문을 당했다" 등의 증언을 했습니다.
하시마 탄광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 중 일부는 원폭피해를 입은 사례도 있었습니다.
일본은 하시마 탄광을 근대문화유산이라고 주장하지만
강제 노역과 수탈, 인권 탄압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숨기고 있습니다.
세계유산 등재
일본은 2009년 1월5일 조선인 강제노동 현장인
규슈·야무구치 지역의 ‘근대화 산업 유산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록했습니다.
2012년 7월3일에는 세계유산 등재 준비를 위한 전문가 회의를 설치하고 도쿄에서 첫 회의를 열었으며,
같은해 9월20일 세계유산조약과 관련한 정부기관 연락회의에서 기타큐슈시의 야하타 제철소 등
메이지 시대 일본 산업혁명 유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기로 공식 결정했습니다.
등재 목표 시기는 2015년이었습니다.
일본은 앞서 하시마 등이 메이지시대 산업혁명의 증거물이라고 주장하며
문화유산 등재기간을 1850~1910년으로 한정해 강제징용에 대한 별도의 역사적 기술 없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고 시도했습니다.
1940년대 조선인 강제징용 사실을 제외함으로써 자신들의 어두운 역사를 덮으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역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이의를 제기했고,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도 전체 역사를 반영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이 조선인 강제노동이 있었음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결정문에 명시하기로 하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었습니다.
국제 무대에서 일본 정부가 강제노역을 공식적으로 처음 언급하게 된 것이며,
일본 입장에서는 이때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면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일본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결정이 나온 지 하루만에 말을 바꿨습니다.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과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시설에서 조선인 강제노동이 없었다고 밝힌 것입니다.
스가 관방장관은 2015년 7월6일 기자회견을 열고 역사적 사실관계를 따졌을 때
산업유산 시설에 조선인 동원문제가 “강제징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2015년 7월5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이 신청한 하시마 탄광 등 23개 근대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를 최종 결정했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23개 시설 중 조선인 강제 노역이 있었던 7개 시설에 대해
강제노동 사실을 반영하는 문제를 놓고 대립했습니다.
이 7개 시설은 하시마 탄광을 비롯해
나가사키 조선소(대형크레인 등 3곳), 다카시마 탄광, 미이케탄광, 야하타 제철소 등입니다.
외교부 자료에 따르면,
이 시설들에 동원된 조선인은 5만7900명에 이르고 동원된 조선인 중 사망자는 94명, 행방불명자는 4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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