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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된 사마천이 눈물로 쓴 <사기>
사마천이 <사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28,9세경이고 50세가 다 되어 죽을 때까지 수정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약 20년의 작업 기간을 거친 셈이다.
그 전에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각종 서적을 섭렵하고 중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혔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미담은 사마씨의 집안이 상고 이래로 사관의 직을 세습해 왔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아들에게 들려 주곤 했다. 그 자신이 한나라 조정의 태사령 (문서의 수집과 관리를 믿는 직책)이었던 사마담은, 그러나 자신이 훌륭한 사서를 짓지 못한 것을 통분하여 임종 직전 아들에게 유언했다.
“우리의 선조는 주나라의 태사였다. 이제 내 대에 와서 끊어지려는가!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어 선조의 가업을 이어라. 이제 한나라가 일어나고 천하가 통일되었는데 나는 태사가 되고서도 이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아아, 두렵도다. 너는 명심하여라!”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듣고 있던 천은 “소자 불민하오니, 선인들의 문헌들을 빠짐없이 정리해 쓰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이 같은 상황이 젊은 사마천을 사기 집필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37세(기원전 99)때 그를 덮친 `이릉의 화`는 그를 죽음의 벼랑으로 몰고 갔다.
사마천이 천거한 장군 이릉이 흉노와의 전투에서 분전 끝에 중과부적으로 항복하여 포로가 되자 한무제를 비롯하여 조정의 모든 신하는 그를 규탄했다.
이 때 사마천만은 이릉을 변호하다 무제의 진노를 사 궁형(죄인의 생식기를 자르는 형벌)에 처해지게 되었다. 공자는 위나라 영공이 환관과 같은 수레에 탔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나라로 떠났을 정도로 당시 지식인들은 궁형을 혐오했다.
사대부로서 가장 큰 치욕을 당한 사마천은 `하루에도 창자가 아홉 번이나 뒤틀렸으며, 집에 있으면 마치 무언가를 잃은 것처럼 불안하고 나가면 어디를 가야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우왕자왕` 극도의 수치감에 시달렸다. 사마천은 사대부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부끄러움을 씻어야 할 처지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살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마천은 열심히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다. “그 옛날 주문왕도 유리에서 구금된 적이 있고 이사는 승상이었으나 다섯 가지 형벌을 모두 받았으며 한신 장군도 차꼬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 모두 지위는 왕후장상에 이르렀고 명성은 이웃 나라에 알려졌지만 그 곤욕을 당해서도 자결할 결단을 내리지는 못했습니다”라고 유명인들의 행적을 들추기도 하고 “제가 불행하여 양친을 일찍 여의고 형제 친척이 없는 홀몸이니 제 처지는 어찌되겠습니까”라며 동정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자살을 마다한 진짜 이유는 이미 초고가 완성된 <사기>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노비라도 능히 자결할 상황이로되 내가 그것을 못할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은연자중하며 구차히 살려고 분토 중에 떨어지는 것도 불사한 것은 마음속에 미진한 바가 있어 한으로 여겼고 죽은 후 문채가 후세에 드러나지 않는 것을 수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라며 사마천은 밀려오는 좌절감과 싸웠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사기>는 본기 12권, 세가 30권, 표 10권, 서 8권, 열전 70권으로 총 130권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 각 항목마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타사공왈`이 삽입되어 있고 말미에는 이 책의 서문인 `태사공자서`가 있다.
이 책은 중국 상고의 황제 시대부터 사마천 당시의 한무제 때까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전국책, 춘추, 좌전, 국어, 세본 등 당시까지 중국 문명이 낳은 거의 모든 기록을 참고로 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까지 중국 문명의 총결산이라 할 만하다.
또 본기(황제에 대한 기록)와 열전(유명한 인물에 대한 기록)을 기둥으로 하고 세가(제후에 대한 기록), 표(연표), 서(문물 제도에 대한 기록)로 구성되는 기전체는 사마천이 처음 시도한 기념비적인 역사 서술 방법으로 그후 역사 서술의 본보기가 되었다.
19세기 말의 청나라 역사책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편찬하는 정사는 모두 이 기전체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춘추전국 시대는 이전의 신화적인 세계관에서 인간 자신에 대한 관심이 높아 가는 철학적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철학적 유산을 이어받은 <사기>는 신들의 역사를 인간의 역사로 대체한 것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그가 당시의 사서로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열전을 설정해서 역사 속에서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은 그 단적인 증거이다.
사마천의 역사를 보는 눈은 매우 날카로워 많은 후세 학자들의 경탄을 자아내곤 했다.
어떤 학자는 현대 역사학자들이 저술한 중국 고대사와 관련된 노저 중에서 <사기>에 제시된 이해의 수준을 능가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있을 정도이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무너뜨리고 전국을 통일할 때 사람들은 위나라가 신릉군을 기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사마천은 전국 말기의 사회 상황이 이미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하게끔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릉군을 기용했더라도 위나라의 멸망은 피할 수 없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잇다.
즉 `하늘의 의지` 앞에서는 어떠한 현군명신이 있더라도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인물 평가에서도 시세를 예민하게 읽고 정확히 대응한 사람들이 역사상에 족적을 남기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즉 역사는 백아숙제 같은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이 아니라 한초의 공신인 소하나 조참 같은 시세를 탈 줄 아는 사람들이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본기를 중심으로 한 체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마천의 기본적인 역사관은 황제를 정점으로 한 제국 질서가 그 바탕이었다. 당시 창성하고 있던 한제국의 위세와 기본적으로 유교적 지식인이었던 그의 입장으로서는 당연한 관점이었다.
그러나 <사기> 곳곳에는 당시 무제의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배어 있다.
예컨대 8서 중의 하나인 평준서는 주로 무제 시대의 소금, 철 전매정책을 중심으로 한 각종 경제정책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 표적은 당시 실력자이며 경제정책의 주역이던 어사대부 상홍양이었다. 무제는 상과 작위를 내릴 정도로 그를 총애했는데 사마천은 평준서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싣고 있다.
“어느 해 가뭄이 들어 점술가에게 자문을 구하니 말하길 `황제는 마땅히 조세만으로 경비를 충당해야 하는데 지금 상홍양은 관리를 시장에 앉혀 물건을 판매시켜 이를 구하고 있으니 상홍양을 삶아 죽이면 하늘이 곧 비를 내릴 것입니다.”
열전의 마지막 편인 화식열전에서도 비판은 이어진다. 화식열전은 전국의 간략한 경제지와 춘추시대 이후 대상인들의 활약을 소개한 것이다.
여기서, 사마천은 각 지역의 특성에 맞는 경제 생활과 그 자체의 원리로 움직이는 경제 원리를 논하고 경제 불간섭주의의 장점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무제와 그의 관료들이 추진하던 획일적인 통일 경제정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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