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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한국사ㆍ세계사ㆍ토막상식

음탕한 여자의 이름 "어우동"

by 모모파크 2020.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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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탕한 여자의 이름 "어우동"

현대엔 어째서인지 기생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조시대 어우동은 엄연히 양반 가문 출신이며 기생은 아닙니다.

 

연산군 일기에 어우동을 '구마'라고도 칭한 것을 보아 본명은 박구마(朴丘麻)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가족 관계로는 아버지는 승문원 지사 박윤창(朴允昌).

어머니는 정귀덕(鄭貴德).

오빠는 박성근(朴成根) 등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 당시 금기에 가까운 간통 사건을 일으켰기에

가문에서 파문되어 성을 뺀 자신의 별명인 어우동(於宇同)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1440년경 충청도 음성현(현 충북 음석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곱게 자란 뒤

왕손인 태강수 이동이란 자와 혼인을 했는데 이동은 아내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동은 이혼을 할 속셈으로 아내 어우동이 집에 온 은장이와 바람이 났다고 모함했는데,

조사 결과 무고로 밝혀져서 어우동과 재결합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그 명을 받지않고, 아내를 내쫓았습니다.

 

 

황당하게 소박을 맞고 홀몸이 된 어우동은 친정으로 돌아왔는데,

이때부터 수산수, 방산수를 비롯한 왕족들, 과거 급제자 홍찬 등 양반, 그 외에

양인과 노비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간통 행각을 벌였습니다.

 

이에, 어우동의 계집종까지 남성을 알선해주고,

심지어 어우동은 어린 소년까지 쾌락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우동과 같은 시대를 살아간 성현이 어우동 사건을 자세히 취급한 것에서,

이 사건이 당시 관료 사회에서도 큰 이슈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간통 대상 중 한 명이 간통 사실을 승정원에 신고했고,

그녀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남자를 사귀라고 옆에 꼬드긴 여종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연관된 고관대작들은 어우동의 사형 이후 재등용 되었다고 하며,

왕명으로 재등용이 되었어도 사람들의 비웃음과 소문을 견디지 못해 그만둔 이들도 여러 있었다고 합니다.

어지간히 뻔뻔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면 타인의 시선이나 수근거림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지만

꽤 많이 정계에서 남아 출세한 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고보면,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이나 수근거림, 또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인지...

권력은 도대체 뭐길래 한번 잡으면 놓치 않기 위해 아등바등 거리며 사는 것일까요?

사실 어우동은 간통죄가 아니라 강상죄로 처형된 것인데,

강상죄는 조선에서 패륜이나,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경우 정도에나 처벌받는 엄청나게 무거운 중벌이었습니다.

 

당시의 형벌인 대명률에 의하면 처녀총각의 간통은 장 80대,

유부녀의 간통은 그에 열대를 추가한 장 90대였습니다.

 

사실 조선 조정에서도 사건 자체는 그냥 간통이었기에 일반적인 간통 사건으로 처리하고자 했으나,

왕인 성종이 강상죄를 적용하라고 강하게 요구하고, 신하들이 반대했으나

결국 왕의 뜻을 꺾지 못해서 사형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그나마 진짜 강상죄가 아니라서 교수형으로 끝났고, 가족들도 연좌되지 않고 넘어갔다고 합니다.

 

양반 집안 출신의 여성이 양인을 비롯한 노비, 십여명과 정을 통한 희대의 간통 사건이라

사회의 파문이 컸다고 전해집니다. 

그러고보면,

왕을 교육할 때 정치를 잘하는 법보다

사람으로 군자로서 지켜야 할 덕목과 올바른 생각에 대해 먼저 교육을 시켰던것 같습니다.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싶다면 그 나은 사람이 되야 할 듯 싶고,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을 가진 사람이 되는게 중요한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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