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
중국사상 단 한 사람의 여황제인 측천무후는 원래 관리의 딸이었다.
미모가 뛰어났던 그녀는 14세에 당나라 제 2대 황제 태종의 비가 되었지만,
태종이 죽자 관습에 따라 비구니가 되었다.
그런데 태종의 뒤를 이은,
아들 고종은 황태자 시절부터 아버지의 후궁인 그녀를 좋아했다.
당시 후궁에서는
정비인 왕황후와 소숙비 사이에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고종의 마음이 소숙비에게로 기우는 것을 질투한 왕황후는,
절에 있는 무조(측천무후의 본명)를 궁궐로 불러들여 소숙비를 견제했다.
그러나 총명한 그녀는 고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왕황후와 소숙비를 쫓아내고 황후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곧 이어 병약한 고종을 대신,
정무를 보기에 이르렀으며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신의 아들인 중종과 예종 두 사람을 재위에 않혔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마음에 안 차 스스로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주라고 했다.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에 등극한 그녀는 왕황후,
소숙비와 자신의 황후 책봉을 반대했던 조정대신들을 죽였다.
또 자기가 죽인 후궁의 30세가 넘은 두 딸을 출가시키자고 했다는 이유로 장남 이홍을 죽였고,
학자로서도 이름이 높았던 차남 이현에게는 모반의 혐의를 씌워 자결을 명령했다.
정통성이 취약한 무후는 추사원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스파이 정치를 자행했다.
주로 반대 세력의 관리들이 희생물이었는데...
추사원의 정문인 여사문은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는 자가 드물어
이곳의 부름을 받은 관리들은 아예 가족들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나왔다.
이미 환갑을 넘긴 측천무후는,
미소년인 장역지, 장창종 형제를 가까이하고 남첩제도를 만들었다.
이의 부당함을 진언한 태자의 장남, 즉 자신의 맏손주도 역시 살해되고 말았다.
그녀는 또 당의 법률에서 금지하고 있는,
미신적인 종교 생활에 평생을 의지하기도 했다.
정신 이상의 광기마저 엿보이던 측천무후는 705년, 83세로 숨을 거뒀다.
잔학무도했던 사생활과는 달리,
무후 시대의 정치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까지 폐쇄적인 기득권층을 형성하며,
오랫동안 정권을 장악했던 개국공신 집단을 제거하기 위해,
측천무후는 유명무실하던 과거제를 공정하게 실시, 실력있는 신인들을 대거 발탁했다.
이들에게만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장안성 북문의 출입을 허용하여,
이들은 `북문지사`라고 불리게 된다.
이 북문지사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곧 이어지는 현종의 황금기인 `개원의 치`에서 당문화의 절정을 꽃피우게 된다.
후세 사가들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에서만은
측천무후를 "일급의 감식가"로 평가하고 있다.
무후가 무참한 칼날을 휘둘렀던 대상도,
그녀로 인해 좌천된 사람들과 황족 세력에 한정되어 있었다.
픅천무후는 역대 어느 황제보다도,
민중 생활의 안정에 신경을 썼고,
이에 따라 그녀의 치세 50년간에는,
그 흔하던 농민 봉기가 단 한 차례도 발생하지 않는 진기록이 세워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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