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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未生 말고 완생 完生 하라!
바둑의 생사활로를 직장생활과 비유한 드라마 <미생> .
직장생활의 애환을 바둑의 한 수에 비견한 이 드라마를 본 직장인들의 공감 100배의 글들이 SNS에 속속 올라온다. 또 직장인 서넛만 모이면 장그래를, 오과장을, 안영이를 저마다 쑥덕인다.
직장인들이 이 드라마에 열광한 만큼 직장인들의 삶이 한마디로 ‘고난의 행군’과 버금가는 ‘천로역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바둑에서 배우는 직장생활의 활로 개척 방법, 그 첫 수를 놓아본다.
그 옛날 도끼자루 썩는지 몰랐던 신선들부터 지금의 한국기원 연습생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두었던 기보. 하지만 신기하게도 똑같은 기보는 단 한 번도 없다.
이것은 가로세로 19줄씩 총 361수를 놓을 수 있는 경우의 수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는 뜻이다.
우리네 삶도 비슷하다.
역사 이래 인간은 저마다의 운명과 팔자로 각자의 삶을, 각각의 모양새대로 살아왔다.
물론 평형이론이라는 조금은 억지스러운 논리를 만들어 이 사람과 저 사람을 엮어내기는 했지만
그 또한 데칼코마니처럼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바둑판의 크기는 대략 45cm이다.
이 정도의 간격을 두고 마주한 두 사람은 가장 밀접하게 서로 교감한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다.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얼굴을 맞대고 일하고, 밥먹고, 술먹고, 싸우고, 격려한다.
마찬가지로 대국에서 첫 수를 놓은 순간부터 마지막 계가의 순간까지,
수없이 많은 고민과 갈등 그리고 선택과 후회를 해야 한다.
바둑은 우리네 보통 사람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착수 着手
강한 개성은 경계심과 동일하다
말 그대로 시작이다. 직장에서 부서를 배치 받는 순간부터 전쟁은 시작이다.
그것이 영업3팀이든, 자원팀이든 상관없다. 물론 실세 전무 뒷배에, 각광받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부서에 배치된다면 기본 70점만 받아도 숟가락 하나 들고 조직의 후광과 그늘에서의 생존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신의 선택’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개는 <진짜 사나이>의 훈련병처럼 바닥부터 기어야 한다.
배우 유준상이 20년 전 자신이 근무했던 이기자부대에서 눈물을 쏙 빼는 것처럼 말이다.
첫 수를 어디에 놓느냐가 바둑의 전체 승부를 좌우하듯 직장에서 첫 수의 원칙은 ‘도발 금지’다.
바둑에서 첫 수는 보통 바둑판을 기준으로 하면 아래쪽, 즉 우하귀나 좌하구에 돌을 놓는 것이 기본이다.
이를 무시하고 우상귀나 혹은 좌상귀에 삼삼 등의 수법으로 돌을 놓는다면 상대방은 자신을 무시하는
‘예의 없는 침투와 도발’로 간주하고 분노의 맞수를 놓을 수밖에 없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다.
첫 인상의 강렬함은 직장이라는 정글에서는 경계심과 동일한 단어이다.
국내 굴지의 S기업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이 회사에 재원이 입사했다.
그녀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칼텍)에서 수학하고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수재였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고 피아노, 성악에, 그림까지 다재다능한
그야말로 완벽의 표본이었다. 당연히 그녀가 배치 받은 곳은 이 기업에서도 신의 부서라 불리는 미주사업본부.
이 부서는 공부면 공부, 스펙이면 스펙 등 소위 상위 1%의 인재들이 모이는 부서다.
더구나 부서원들 역시 집안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집안의 자제들이다.
유일한 홍일점이었던 그녀는 첫 프로젝트부터 사고를 쳤다.
이 부서에서 그동안 관례에 따라 진행되던 업무에 혁신을 불러일으킨 것.
근무 한 달도 되지 않은 그녀의 첫 보고서에는 부서의 업무 분담 방식과 보고 체계, 프로세스까지 모조리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담겨 있었다.
당연히 부서에는 비상이 걸렸다.
부장은 은근히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고, 부서원들도 그 행동에 암묵적으로 동참했다.
“어쩐지 첫 인상부터 사고 칠 줄 알았어”, “무슨 지만 똑똑한 줄 알아”, “요즘 애들은 기본이 없어” 등등
그녀를 향한 공격은 그야말로 ‘무조건’이었다.
이 정도의 부서 분위기라면 대개의 경우 기세를 꺾기 마련인데 그녀는 여기서 또 한 번의 사고를 쳤다.
이 모든 사항을 기록한 뒤 이 부서의 직계 임원인 상무에게 보고한 것이다.
보고서의 내용은 이 부서에서 자신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고 업무적 혁신은 관례라는 이름으로 무시 당한다는 것. 그래서 자신은 이 조직의 발전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사표를 내겠다는 당찬 내용이다.
상무는 이 보고서를 토대로 부장과 차장을 불러 모욕적인 언사와 함께 그녀를 옹호했다.
“부장, 차장은 만약 그녀가 사표를 내거나 더 이상 부당한 이야기로 여러 가지 말이 내 귀에 다시 들린다면,
당신들 사표를 받겠다. 당신들은 나가도 되는 사람이지만 그녀는 여기서 꼭 필요한 인재이다.”라고.
부장은 기다렸다.
근 1년 동안 교묘한 방법으로 그녀를 괴롭혔고, 그녀에게는 실현불가능한 혹은 성사된다 하더라도
빛이 안 나는 프로젝트만 주기 시작했다.
결국 1년을 버티던 그녀도 자진해서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다.
개인은 조직을 이길 수는 없다. 아니 이긴다, 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조직원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참한 관례라는 기차는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녀의 가장 큰 실수는 조직원에게 도발을 했던 첫 수의 패착인 것이다.
물론 비효율적이고, 정체되어 있는 조직에서 하루하루 자신의 경력만 연장하는 것도 좋은 수는 아니다.
다만 변화와 혁신, 이런 단어들은 기존의 조직원들에게 자신들을 퇴물과 제거 대상이라는 말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습성이 있다. 그 습성은 이용해야 한다.
좀 더 편안하게 좀 더 간편하게 기존의 혜택은 유지하면서라는 전제가 필요한 것이다.
그녀는 신입이다. 신입이 해야 할 일은,
더구나 첫 번째 일은 조직을 뒤흔드는 개편이나 변화가 아닌
조직의 기능과 그 안에서 나의 역할을 파악하는 것이다.
첫 수는 항상 자신의 손 안에서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여야 한다.
그것이 패착이 되건, 묘수가 되는 것의 여부는 당장이 아닌 1년 뒤쯤이 가능하니까.
포석 布石
먼저 두 집 내고 살아야 한다
바둑에서는 초반에 돌을 놓아 모양을 만드는 것을 포석이라고 한다.
이 포석은 향후 바둑의 전개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세력, 모양, 실리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바둑계에서는 기풍으로 동양 삼국의 바둑을 평가 한다.
현대 바둑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에서는 모양을 중시한다.
기풍이 국민성을 따라 가는 것처럼 일본 기원에서는 정석에서 어긋나거나, 파격 등
이른바 예측 불허의 수를 두는 것을 바둑의 예와 도를 모르는 무식한 방법이라도 폄하한다.
물론 장점도 있다.
이 포석으로 바둑을 이기든 지든,
가장 완벽한 형식과 수순으로 정렬된 흑과 백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그림이 바둑판에 펼쳐진다.
이와 반대로 지금 세계 최강의 바둑 실력을 자랑하는 중국에서는 실리를 추구한다.
역시 경제적인 관념이 투철한 중국인의 기질과 바둑이 닮았다.
모양이 비뚤어져도, 정석에서 벗어나도 일단 집부터 짓는, 나부터 살고 보는 실리를 챙기는 것이다.
그 후에 상대의 돌을 공격하기 때문에 한국이나 특히 일본 기사들은 중국 기사와 만나면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이
지금 세계 바둑계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한국 프로 기사들의 기풍은 어떨까.
물론 개개인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모양과 실리를 통합한 이른바 한국식 전투형 바둑이다.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 이세돌, 김지석으로 이어지는 한국 바둑의 계보에서는 전투형 기사의 풍모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모양을 갖추면서 상대의 도전에는 강력한 힘으로 대응해 전투를 벌이는 스타일인 것이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모양새 좋게 밝은 태도와 항상 웃는 얼굴 즉 일본식 기풍으로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제 직장에서는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다.
굳이 직장 생활 처세학을 바둑 기풍으로 비유하자면 중국식에 한국식 기풍을 적절하게 혼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먼저 바둑은 두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우선이듯 직장에서는 내 자리를 확실하게 잡는 것이
중요하다.
바둑용어에 ‘아생연후살타(娥生然後殺他)’가 있다.
즉 ‘내가 산 후에 상대방을 공격한다’는 뜻이다.
직장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업무의 비중이나 자리의 무게감 혹은 계급과는 무관한 것이다.
물론 전제가 있다.
그 어떤 직장에서도 꼭 필요한 사람은 없다.
‘꼭 필요한 사람’이란 유일하게 오너와 오너 가문만을 형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그 사람이, 내가 없으면 지구가, 회사가, 부서가 곧 멸망할 것 같아도
회사에는 항상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 오형제’가 다시 나오기 마련이다.
살아야 한다는 것은 조직에 순응한다는 뜻과 동일하다.
비굴과 비슷한 단어라는 것을 부정하면 안된다. 다만 잊으면 된다.
물론 회사는 비굴, 순종, 복종이란 단어를 표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성실, 노력, 충성심 등의 단어들은 대체되고, 또 조작될 수 있고 상징화 가능한 의미로 탈바꿈한 채 조직을 추스른다.
두 집 내고 살기 위해 부장에게, 조직에게서 당신은 일단 성실, 노력, 충성심이란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직원이란
평판을 얻어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방법은 수없이 많다.
출퇴근 등의 근태에서, 회사의 각종 행사에서, 근무 태도에서, 점심시간이나 회식자리에서
그리고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려운 ‘대단한 성과’에서다.
일단 이 세 단어 중에서 최소한 2가지 이상을 획득했다면 고개를 들고 위를, 옆을 살펴보아도 된다.
그러면 당신이 돌을 놓아야 할 허허벌판의 공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이런 주장에 대개의 직장인은 ‘무슨 회사가 군대도 아니고….’라는 반감을 품을 수 있다.
그들에게 딱 한마디 전하고 싶다. 드라마 <미생>에서 나온 대사이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밖에 나가봐. 거긴 지옥이야.”
행마 行馬
직장 생활 기보를 작성하라
자신의 돌 주변에 새로운 돌을 놓아 가면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바로 행마이다.
조훈현 프로는 ‘천근같은 무게의 돌을 깃털처럼 경쾌하게 둔다’ 해서 ‘제비’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창호 프로는 전성기 시절 말 그대로 ‘신산(神算)’이라 불리며 몇 수 앞을 내다보는 바둑을 두었다.
또한 이창호 프로는 상대방들에게 ‘아무리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마치 돌부처와 바둑을 두는 느낌이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처럼 바둑의 행마는 기풍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직장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행마는 직장인이 궁극의 목표를 향해 나가는 즉 자신의 진로와 같은 이야기다.
이것에는 바둑이 자신의 돌로 세력을, 집을 만들어나가는 것처럼 직장에서는 인맥을, 후견인을,
그리고 인정을 받기 위한 자신의 한결같은 태도와 동일시 할 수 있다.
상상해보라.
가로세로 각기 19줄의 바둑에서 위와 아래, 좌와 우에 돌을 놓은 행마가 다르다면
그 바둑을 승리로 이끌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다.
직장인인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일의 성격에 따라, 요일에 따라, 자신의 기분에 따라 일을 대하는
태도를 달리 할 수는 없다. 물론 회사 생활은 변주곡처럼 오늘도 많은 일들이 그야말로 파노라마처럼 달려온다.
하지만 직장 생활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라톤이다. 42.195km를 그야말로 끊임없이 달려야 한다.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자유다.
직장 생활에서 행마는 마라톤 근육이 필요한 것이다.
직장인의 성과는 기억되지만 그와 똑같이 실수도 기록된다.
성실은 쉽게 얻을 수 없지만 마일리지와 같은 성격으로 그 효능은 동일하다.
처음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성실하게 마일리지를 쌓아나가는 것은 인내심이 필요한 것이다.
관리해야 한다.
인맥도, 성실도, 그러기 위해 당신의 일기장이 필요하다.
장그래의 직장 생활에서의 기보가 있었듯이 말이다.
일기라는 단어가 부담스럽다면 메모라고 가볍게 표현할 수 있다.
그 메모에는 당신을 중심으로 당신의 직장 동료, 상사, 후배와의 그날그날의 업무는 물론
사적인 친교나 그들의 개인적인 행사 즉 생일이나 집안 경조사 정도를 간단하게 요약해 기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6개월 정도 혹은 1년 정도만 누적된다면 고수의 기보를 얻은 신인 기사의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직장 생활은 동어 반복이다.
같은 업무를 상대와 시간에 맞춰 가는 것이다.
1분기 혹은 상반기나 1년 경영 보고의 패턴은 동일하다.
그 패턴을 읽는다면 당신은 부서의 모든 일을 한발 앞서 준비하는 그래서 항상 조직을 먼저 생각하는
유능하고 성실한 사원이 되는 것이다.
그 모든 공은 물론 부장에게로, 선배에게로 가는 것이다.
이것 역시 당신의 마일리지를 두둑하게 해줄 것이다.
2015년 경영보고를 앞두고 있는 부서에서 챙겨야 할 서류와 숫자, 동종 업계의 동향까지
그 누구보다 2주 앞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서류를 경영보고의 책임을 맡은 과장 책상에 슬쩍 놓는다면
그 과장은 당신의 행마에서 첫 번째 인맥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다.
명심하라.
행마는 성실하게 그리고 가벼우나 경박하지 않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다면기 多面棋
기분 좋은 패배를 이끌어라
바둑은 보통 비슷한 실력의 두 대국자가 두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야 싸움이 되는 것이다.
헤비급과 플라이급 선수가 권투시합을 할 수 없듯이 프로 9단이 아마 18급과 대국을 하는 것은
직장에서 신입 사원이 그룹 회장과 맞상대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인생사 예외는 있는 법.
그것이 가능한 것이 딱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접바둑이라 해서 상대에 따라 두 점, 넉 점, 혹은 8점을 미리 바둑판에 올려 두는 것이다.
이 경우는 근접한 범위 내에서 싸움이 되기도 한다.
또 하나는 다면기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프로 선수가 바둑 동호인 약 수 십 명과 한 번에 대국을 하는 것이다.
일테면 남자들의 술자리에서 간혹 터져 나오는 전설의 1:17의 싸움 같은 것이다.
예를 들면 프로 고수가 10명의 동호인과 다면기를 둔다면 10명의 아마추어는 앉은 채로,
프로 기사는 선 채로 돌아가면서 대국을 두는 것이다.
프로는 첫 번째 동호인에게 한 수를 놓고 쭉 이어서 10명과 상대를 하는 것이다.
물론 동호인은 다른 9명의 동호인과 한 수를 놓고 다시 자신에게 프로가 오는 순간까지 생각할 시간을
벌기도 하지만 이 역시 승부와는 별 의미가 없다.
대개의 경우 프로의 완승으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다면기는 한국기원에서 일 년에 한두 번 바둑 동호인을 위한 일종의 이벤트로 진행한다.
이 이벤트의 경쟁률도 만만치 않아 동호인으로서는
프로와의 한 판 승부의 기회는 평생 한 번 올 정도의 행운인 셈이다.
<미생>에서 장그래가 김대리에게 말한다.
“직장에서 신입은 마치 다면기를 두는 것 같아요.
오과장님과, 김대리님과, 한상률 씨와….
그런데 이 경우도 흑을 쥔 제가 덤을 남겨야 하네요.”라고. 맞는 이야기이다.
을이라는 존재는 항상 그 위에 갑이 존재하고 그 갑은 을로서 또 다른 갑의 지배를 받는 것이 바로 직장이다.
더구나 부장, 차장, 과장, 대리로 이어지는 부서 구성원이 당신 즉 신입 사원을 보는 시각이 동일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엄한 시어머니를, 누군가는 말리는 시누이처럼 얄미운 존재로, 누군가는 따뜻한 시아버지로,
또 다른 이는 무덤덤한 시동생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입의 업무 능력에 대한 평가에서도 현저한 차이를 부른다.
한 부서의 책임자인 부장은 개개인의 업무 능력보다는 부서의 전체적인 성과에 더 가치를 두기 마련이다.
타부서와 비교를 통해 자신이 맡은 부서의 존재가치를 평가 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장이나 대리는 다르다. 동일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한 배를 탄 동승자로서,
n분의 1의 책임과 의무를 부여받은 파트너로서 신입을 바라본다.
당연히 엄격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많이 부딪친다는 것은 빨리 친숙해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상대의 장점과 단점을 빨리 파악할 수 있다는 얘기와도 같다.
그들은 당신의 능력 중 단 10%만 보고서도 당신을 조직에서 ‘생존자’ ‘탈락자’ 혹은
‘더 지켜볼 자’로 간단하게 규정짓는다.
신입이 해야 할 일은 그 분류를 뒤집을 수 있는 한방이다.
그 한방은 차장이나 부장이 마패를 쥐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설사 바로 위 대리가 당신을 탈락자로 낙인찍어도 부장이 당신을 생존자 명단에 올릴 수 있다.
직장에는 단 한 번의 대국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서원이 7명이라면 당신은 6명과 동시에 바둑을 두는 것이다.
모든 대국에서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제로다.
그렇다면 당신이 해야 할 최고의 대국은 모든 대국을 마지막 계가의 순간까지 이끄는 것이고
그 중 단 한 국만이라도 상대 대국자의 뇌리에 남을 인상적인 바둑을 두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지더라도 기분 좋은, 아름다운 승부를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다.
당신의 대국자들은 당신과의 대국에서 승리를 만끽하려는 욕망보다는 당신의 바둑에 임하는 태도와
순간의 판단력,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보고 바둑을 두는가를 더 궁금해하기 때문이다.
성실할 필요가 있다는 것, 메모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여기서 증명되는 것이다.
물론 부장과의 승부에 모든 것을 올인하는 것도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은 전략이다.
오로지 “난 단 한 명만 팬다”는 송강호식 전법이 유용할 수도 있겠지만
부장의 귀는 항상 열려 있고 당신은 대리, 과장보다 그 귀에서 먼 위치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분 좋은 그리고 인상 깊은 패배를 남기는 것이다.
사활 死活
팔과 다리를 버리고 몸통을 취하라
바둑에서 돌과 세력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다다른 것을 사활이라 한다.
이 경우 고수는 바둑판에 포진한 자신의 세력 중에서 버릴 것을 찾는다.
그것이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판단을 하는 순간
고수는 미생의 돌을 과감하게 버리고 나머지에 몰두한다. 하지만 하수들은 그렇지 못하다.
이 곳 저 곳을 모두 살리려는 마음에 돌은 우왕좌왕 바둑판을 날아다니고 자신의 목표와 행마의 기본을 잊게 된다.
그리고 몇십 수를 더 끙끙대다가 패배에 몰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대개의 직장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활의 순간을 맞게 된다.
이 경우 ‘이 직장을 계속 다녀야 하는가’라는 고민이 슬며시 머리를 쳐들고
그러다 보면 고민과 회의감에 사표를 만지작거리게 된다.
이 순간 먼저 생각할 것이 있다.
그것은 대국을 사활에 이르게 만든 패착을 찾는 것이다.
업무, 동료 및 상사와 의 관계, 그외 자신의 개인적인 상황들일 것이다.
이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 패착의 순간은 그 실수를 알아챌 정도의 강도는 아니다.
그것이 누적되어 낙숫물에 바위가 뚫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먼저 바둑 고수의 행마를 흉내낼 필요가 있다.
버릴 것을 찾는 것이다.
무림 세계의 고수들은 고수와의 승부에서 승산을 가늠할 수 없을 때 작은 것을 주고 큰 것을 얻는 수법을 쓴다.
즉 팔이나 다리 한 쪽 등 생명과 직접 관련 없는 것을 적에게 노출하고
그것을 노리는 적의 칼의 빈틈을 노려 적의 목숨을 노리는 것이다.
직장에서 쫓겨날 정도의 사활이 아니라면 지금의 곤란한 지경을 빨리 받아들이고 살 길을 도모해야 한다.
겨우 한 집이나 혹은 두 집 정도의 세력에 연연하다가 10집, 20집 크기의 대마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억울해도, 미련이 남아도 잘못은 인정하고 털고 가는 것이 가장 좋은 행마이다.
A보험사의 박 모 과장 이야기다.
30대 중반의 그는 잘 생긴 외모와 호감가는 언변
그리고 빠른 일처리로 동기들 중에서 가장 빨리 과장으로 승진했다.
동료들은 진심으로 그를 축하해주었고 상사들은 오랜만에 유능한 사원이 들어왔다고 기대가 컸다.
그때부터 그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승진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업무 성과에 대한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 회사는 개인, 팀, 부서, 본부별로 성과를 집계해 각 부서원에게 고르게 고과를 평가하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박과장은 성과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후배의 실적 중에서 몇 %를 자신의 성과로 둔갑시키기 시작했다.
후배들은 약간의 불만이 있었지만 잘 나가는 과장의 위세,
그냥 넘어갈 정도의 성과라는 점에서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박 과장은 점점 대담해졌다.
후배들은 물론 팀과 부의 성과까지 자신의 것으로 집계를 해 상무에게 보고했고 오히려
자신이 후배와 다른 팀에게 조금씩 성과를 나누어주는 것이라는 거짓말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보다 못한 후배와 다른 팀 과장들이 들고 일어섰다.
물론 회사에 직접 보고를 하기 전에 박 과장을 불렀다.
사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박 과장이 지난 잘못을 시인하고 앞으로 이런 일의 재발방지를 약속한다면
한 번은 용서하겠다는 사전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박 과장은 이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로서는 자신을 신임하는 상무의 위세를 믿었고 또한 경쟁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하던 이들에게
집단 비난을 받는 자신이 오히려 억울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고성이 오고 간 끝에 모임이 파했고 이들은 상무와 전무에게 지난 1년 간
박 과장의 성과 조작을 공식적으로 제기했다.
회사는 박 과장에게 지방근무를 명령했고 결국 박 과장은 사표를 쓰고 말았다.
분명 박 과장에게는 사활의 위기가 다가왔다.
그는 이 순간 판세를 잘 못 판단한 것이다.
상무의 신임은 그가 성과를 올린다는 전제 하에서 가능한 것이다.
어떤 상사도 부하직원에게 개인적인 호불호가 분명히 있겠지만 그것은 업무의 연장선에 가능한 것이다.
박 과장이 부당한 방법으로 성과를 조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당연히 상무의 신임은 거품처럼 사라진 것이다.
또 박과장은 후배와 동료들의 존재를 너무 가볍게 봤다.
조작된 성과로 이뤄낸 우월감을 실제의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가 만약 한순간의 자존심을 버리고 진심으로 잘못을 깨닫고 후배와 동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면
박 과장의 대국은 계속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다.
바둑에서 ‘곤마 困馬’가 있다.
이것은 적에게 몰려 내 돌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는 것이다.
또 ‘단수 單手’ 즉 상대 돌에 둘러싸여 죽기 일보 직전도 있다.
이때 고수는 상황을 잘 판단해 곤마와 돌 한 개의 사활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작은 욕심과 자존심이 큰 성취와 명예를 잃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계가 計家
인생의 계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둑판을 흑과 백으로 다 채우고 나면 집 수를 세어 승부를 가린다.
이것이 바로 계가이다.
일단 대국이 계가까지 갔다는 것은 승부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바둑에서 계가에 이르지 않고 승부를 가리는 것을 ‘불계(不計)’라 한다.
즉 어느 한 쪽이 집 수를 세어 볼 것도 없이 ‘돌을 던지는 것’을 말한다.
직장생활에서 불계는 ‘불계패(不計敗)’를 의미한다.
이것은 바둑에서처럼 돌을 던지는 대신에 사표를 던지는 것이다.
그 어떤 경우이든 아름답지 않은 결과이다.
바둑의 고수들 사이에서도 계가와 불계패 중 과연 어떤 것이 후유증이 더 큰가는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불계로 지는 경우가 다음 판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고 한다.
마찬가지다.
불계로 직장에서 이탈한다면 그에게 다음 기회는 쉽지 않다.
경지에 오른, 즉 프로 기사들에게는 수없이 많은 기회가 온다.
오늘 불계로 패하건 대승을 하건 그에게 이 대국은 수많은 대국 중 하나 일뿐이다.
하지만 직장인은 어떤 경우라도 중도에 돌을 던지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
대국에 임했으면 마지막 361수를 놓는 순간까지 이 대국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프로 입단에 실패하고 직장인이 된 장그래. 그에게 회사는 전혀 다른 세계가 아니다.
10여년 간 피눈물나게 준비했던 프로 입단의 시간보다 더 진하고, 더 단내 내뿜는 시간이 기다리는 것이다.
군대에서 별을 달고 장군이 되고, 회사에서 이사가 되어 임원이 되는 것처럼
기사들의 세계에서 입단은 장군이, 임원이 된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직장인의 계가는 어떤 순간에 이루어지는가.
대개는 입사 3년 차, 과장 승진시, 부장 승진을 눈 앞에 두고가 대부분이다.
그 순간마다 당신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돌을 던지면 다시는 이 대국의 기회가 없다는 점이다.
장그래에게 프로 입단을 준비했던 10년 세월이 지금의 직장 대국을 가능하게 한 것처럼
직장인에게는 20년의 세월이 기다리고 있다.
그 기간 동안 당신의 대국은 위태로운 행마,
사활의 지경에 처할 수는 있겠지만 마지막 계가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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