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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의 오덕(五德)과 삼반(三反)
조선조 초의 명상 정인지(鄭麟趾)는 '젖과 막걸리는 생김새가 같다' 하고
아기들이 젖으로 생명을 키워 나가듯이 막걸리는 노인의 젖줄이라고 했습니다.
정인지를 비롯 문호 서거정(徐居正), 명신 손순효(孫舜孝)등은
만년에 막걸리로 밥을 대신했는데 병없이 장수했으며, 노인의 젖줄이라 함은 비단 영양 보급원일 뿐아니라
무병장수의 비밀을 암시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조선조 중엽에 막걸리 좋아하는 이씨 성의 판서가 있었습니다.
언젠가 아들들이 "왜 아버님은 좋은 약주나 소주가 있는데 막걸리만을 좋아하십니까" 하고 물었는데...
이에 이판서는
소 쓸개 세 개를 구해 오라 시켰습니다.
그 한 쓸개 주머니에는 소주를,
다른 쓸개 주머니에는 약주를,
나머지 쓸개 주머니에는 막걸리를 가득 채우고
처마 밑에 매어 두었다고 합니다.
며칠이 지난 후에 이 쓸개 주머니를 열어 보니,
소주 담은 주머니는 구멍이 송송 나 있고,
약주 담은 주머니는 상해서 얇아져 있는데,
막걸리 담은 주머니는 오히려 이전보다 두꺼워져 있었습니다.
막걸리에는 오덕(五德)과 삼반(三反)이 있습니다.
▷ 취하되 인사불성일 만큼 취하지 않음이 일덕(一德)이요,
▷ 새참에 마시면 요기되는 것이 이덕(二德)이며,
▷ 힘 빠졌을 때 기운 돋우는 것이 삼덕(三德)이다.
▷ 안 되던 일도 마시고 넌지시 웃으면 되는 것이 사덕(四德)이며,
▷ 더불어 마시면 응어리 풀리는 것이 오덕(五德)이다.
▶ 옛날 관가나 향촌에서 큰 한잔 막걸리를 돌려 마심으로써,
품었던 크고 작은 감정을 풀었던 향음(鄕飮)에서 비롯된 다섯 번째 덕일 것입니다.
놀고 먹는 사람이
막걸리를 마시면 속이 끓고 트림만 나며 숙취를 부른다 해서
근로지향(勤勞志向)의 반유한적(反有閑的)이요
서민으로 살다가 임금이 된 철종이
궁안의 그 미주(美酒)를 마다하고 토막의 토방에서
멍석 옷 입힌 오지 항아리에서 빚은 막걸리만을 찾아 마셨던 것처럼
서민지향의 반귀족적(反貴族的)이며
군관민(軍官民)이 참여하는 제사나 대사 때에 합심주로
막걸리를 돌려마셨으니
평등지향의 반계급적(反階級的)으로
막걸리는 삼반주의(三反主義)다.
오덕(五德)을 지닌 술, 막걸리
취하되 인사불성이 되지는 않고,
마시면 요기가 되며,
힘이 없을 때 기운을 북돋우고,
힘겨울 땐 넌지시 웃게 해주며,
더불어 마시면 응어리가 풀리는 오덕(五德)을 지닌 술,
막걸리.
괴나리봇짐 멘 장돌뱅이의 주막부터 잇 백을 든 미인들의 막걸리 하우스까지
시대는 달라졌어도 ‘사람 사는 정이 깃든 술’이란 의미는 그대로인 막걸리의 스타일링이 활발히 진행 중이며,
다채로워진 술잔과 술맛이 이를 증명합니다.
양은 대접부터 유리잔까지, 인정을 마시고 흥에 취하다
술잔은 맛과 향을 돋우면서 그 술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소주는 소주잔에,
와인은 와인글라스에 마셔야 제격이다.
소주와 와인은 물론 청주, 맥주, 양주도 모두 제 잔을 가지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막걸리만 제 잔이 없습니다.
양은 대접도 좋고,
‘스뎅’ 그릇도 좋으며,
플라스틱도 괜찮고,
옹기나 백자 사발에 마셔도 좋다.
심지어 가정에서는 밥그릇이나 국그릇을 잔으로 쓰기도 합니다.
막걸리가 제2의 전성기를 맞은 지금, 막걸리 잔이 화두로 떠올랐는데...
막걸리는 과연 어떤 잔에 마셔야 좋을까요?
‘마구 거른 술’이란 이름에서 느껴지는 순박함처럼 정형화되지 않은 술,
막걸리는 담는 잔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양은 주전자와 잔은 ‘정 情’
막걸리 전성기이던 1950~6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사람 중에는,
술 받아 오는 심부름을 하다 자연스레 막걸리 맛을 익힌 이가 많습니다.
두 되들이 양은 주전자를 가득 채운 막걸리가 ‘무거워서’ 또는 아버지가 즐겨 마시는 막걸리 맛이 ‘궁금해서’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봤더니 ‘순하고 부드럽게 넘어갈뿐더러, 뒷맛이 달콤해 자꾸 마시다 보니
결국 거나하게 취해 집에도 못 가고 논두렁에서 잠드는 바람에 어머니에게 야단맞았다는 레퍼토리가 흔합니다.
커다란 양은 주전자와 막걸리는 찰떡궁합입니다.
노란 양은 주전자에 그득 담긴 막걸리를 두고, 함민복 시인은 그의 에세이집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에서
“막걸리는 무거워서 아랫사람한테 따를 때도 두 손으로 따라야 하는 술이여.
예의 바른 아니, 예의 가르치는 술이란 말이여”라고 말했습니다.
마을 잔치에서,
혹은 들일 나간 농부들이 새참을 먹은 뒤 한 사발씩 들이켜던 그 양은 주전자의 막걸리 속에는
사람에 대한 배려와 넉넉한 인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스뎅’ 잔은 마음의 위안
우리나라 대폿집과 양조장을 돌아다니며, 각 지방의 독특한 막걸리를 일일이 마셔본 뒤 그 맛과 정서를 기록해
일본에서 <맛코리노 다비>란 책을 출간한 출판 기획자 야마시타 다쓰오 씨 (작가는 정은숙 씨로 우리나라에서는
<막걸리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는 방영한 MBC의 <시사 매거진 2580>에서
“식당에서 혼자 대폿잔을 기울이는 어떤 아저씨의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좀 슬픈 느낌도 있고, 외로운 느낌도 있고.
저도 따라 해봤지만
그런 모습은 50대 이상이 아니면 안 되는 것 같더라고요”
라는 말을 했습니다.
화면에는 어느 허름한 식당에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스뎅’ 잔을 기울이는 중년 남성의 모습이 비춰졌는데...
야마시타 다쓰오 씨가 본 아저씨처럼 홀로 앉아
‘스뎅’ 잔을 기울이던 남자는 막걸리 한잔에 위안을 얻고 있지 않았을까요.
21세기,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막걸리가 잔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특히 일본 시장에서 ‘막걸리는 유산균이 풍부해 미용에 좋으며, 맛은 부드럽고 순하다’는
세련된 이미지가 굳어지면서 막걸리를 담는 잔과 병의 디자인도 변화하는 추세입니다.
음식으로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때는
다만 이것뿐인데
어찌 내 한 가지뿐인 이 즐거움을
마다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우주도 그런 것이 아니고
세계도 그런 것이 아니고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니다
목적은 다만 즐거움인 것이다
즐거움은 인생 최대의 목표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다
밥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 주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 천상병 시인의 시 ‘막걸리’ 중
우리쌀로 빚은 막걸리
막걸리는 곡물과 누룩 그리고 물로 빚습니다.
이는 청주 또는 약주라 부르는 우리나라 전통 주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청주는 술독에 넣은 용수(원통형 모양의 술 거르는 용구)에, 고인 맑은 술만 떠낸 것이고,
막걸리는 청주를 떠내지 않은 채 그대로 체에 거르거나
청주를 떠낸 뒤 남은 술지게미를 으깨서 체에 밭은 술을 뜻합니다.
이렇게 만든 막걸리는
술을 빚을 때 넣은 곡물도 함께 섭취할 수 있어 마시면 밥처럼 든든합니다.
작가 장승욱 씨가 그의 에세이집 <술통>에서
“후배와의 여행길, 돈이 없어 밥 대신 막걸리를 마시고 막걸리 힘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고
소개했듯이 막걸리 한 잔에 담긴 든든함은 막걸리의 큰 매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밥처럼 든든한 막걸리의 특성이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에서 인기가 있는 막걸리는 무겁고 탁한 막걸리가 아닌 산뜻하고 깔끔한 제품입니다.
따라서
전국 각지의 많은 양조장은 고유의 맛을 지키면서도
시대에 맞춰 변신한 제품을 속속 개발하고 있습니다.
유년기부터 막걸리 맛을 봐온,
막걸리 애호가인 소설가 성석제 씨는 이 막걸리를 두고 “근자에 몇 번 마시게 된 깔끔한 맛의 고급 막걸리.
너무 깔끔해서 마시는 사람도 근신하게 만드는 기미가 느껴진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전국에서 막걸리를 두루 즐길 수 있으면 좋겠지만
생막걸리의 경우 유통기한이 10일 이내이기 때문에 유통이 활발하지 않은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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