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폰 노이만 [ Johann Ludwig von Neumann ]
컴퓨터 중앙처리장치의 내장형 프로그램을 처음 고안한 미국의 수학자, 물리학자.
1949년 에드삭(EDSAC)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컴퓨터를 만들었으며,
이때 고안한 방식은 오늘날에도 거의 모든 컴퓨터 설계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1903년 12월 28일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대인으로 그의 성 앞에 붙는 폰(von)은 귀족 가문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부유한 은행가의 삼 형제 중 장남이었던 그는
어릴 때부터 수학에 재능이 뛰어나 12세에 프랑스의 수학자 보렐의 함수론을 이해하였으며,
18세에 페케테와 공동으로 다항식에 관한 논문을 독일의 수학잡지에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존 폰 노이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 출신의 미국인 수학자, 물리학자, 화학자,
컴퓨터 과학자로, 그는 양자 역학, 함수 해석학, 집합론, 위상수학, 컴퓨터 공학, 기하학, 수치해석, 경제학,
통계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걸쳐 업적을 남겼으며 연산자 이론을 양자 역학에 접목시킨
최초의 선구자 중 하나였습니다.
맨해튼 계획과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참여하였고 게임 이론과 셀룰러 오토마타의 개념을 공동 개발하였고,
또한 디지털 컴퓨터의 발달에 관여하는 등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1921년 부다페스트대학교 수학과에 입학했을 때에는 이미 일류 수학자로서 인정받았습니다.
1927년 베를린대학교 강사, 1929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 강사를 거쳐
1930년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객원교수가 되었습니다.
1932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가 세워지자 1957년 사망할 때까지 연구소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그의 연구는 수학기초론에서 시작하여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설정 등 수리물리학적 과제를 대상으로 하고,
또한 수리경제학이나 게임이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였습니다.
1937년, 미국 귀화 시민이 되고 나서 그는 당시의 2차세계 대전에 도움을 주기 위해
중위 시험인 미국 육군의 장교 준비 제도 이사회(USAR)의 간부시험에 지원하였습니다.
그는 쉽게 시험을 통과하지만, 궁극적으로 그의 나이로 인해 거부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34세였습니다.
노이만은 1937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나치 독일과의 전쟁은 수치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육군에 자청하지만, 위에 말했다시피 불채용되었으나,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폰 노이만은 폭발물 분야에서 수학적 연구의 전문가가 되고,
미국 해군에 대한 컨설팅 작업을 했습니다.
이 분야에서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큰 폭탄에 의한 피해는 폭탄이 지상에 떨어지기 전에 폭발했을 때 더 커질 것"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이론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 폭탄에 이용되었습니다.
원자 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
나가사키에 투하 된 플루토늄형 원자 폭탄 팻 맨을 위한 폭축렌즈의 개발을 담당했습니다.
1940년대에 폭발의 파면 구조에 대한 ZND 이론을 확립하였으며,
이 이론을 바탕으로 10개월에 걸친 수치 해석을 통해 폭약을 32면체에 배치함으로써
원자 폭탄이 실제로 실현할 수 있는 무기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폰 노이만은 미국과의 교전국이던 일본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이었는데,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 지점을 선정할 때 문화재가 많은 도시였던 교토에 대해
"일본 국민들에게 교토가 문화적 가치가 많다면 더더욱 그곳을 섬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폰 노이만이 만든 계획은 폭격기에 원자폭탄을 실은 뒤
교토 상공에 직접 투하해 도쿄 대공습과 같이 도시를 완전히 말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교토에 신혼여행을 갔다왔었던 헨리 스팀슨 국방장관이 반대해 대신 히로시마로 정해졌습니다.
일생 동안, 폰노이만은 150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순수 수학 60편, 물리학 20편, 응용 수학 60편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컴퓨터와 뇌(The Computer and the Brain)는 사망직전 병원에서 집필되었는데,
집필 도중 그가 사망하면서 미완성의 원고로 남게 되었고 훗날 책 형태로 출판되었습니다.
1944년에는 모르겐슈테른과 "게임이론과 경제행동"을 저술하였으며, 기상연구용 컴퓨터 고속도 전자계산기
(MANIAC)의 연구·제작과 수치해석에 기여한 공로로 페르미(Fermi)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 외에 머리(Murray)와 함께 "작용소환론"과 "연속기하"를 창시하였습니다.
1942년 8월에 '맨해튼계획'에 참여하여 '컴퓨터 프로그램 내장방식'을 "전자계산기의 이론 설계 서론"에
발표한 후, 1949년 마침내 에드삭(EDSAC; Electronic Delay Storage Automatic Computer)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컴퓨터를 만들었습니다.
이때 고안한 방식은 오늘날에도 거의 모든 컴퓨터 설계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순서도와 서브루틴, 몬테카를로법을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그는 어학에도 뛰어나 영어는 물론 독일어와 프랑스어·라틴어·그리스어를 사용하였습니다.
1957년 2월 8일 암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존 노이만 일화
폰 노이만의 학문적 업적 그 자체들은 뛰어나다는 것에 대해 이론의 여지가 없고,
노이만 본인의 머리가 천재적으로 비상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하기에 서술한 관련된 일화들은 사실이 과장되거나 후대에 와서 지어낸 얘기가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예를 들어 이 문단에 쓰여있던 글들인 "트리니티 핵실험 당시 폰 노이만이 폭발 에너지를 암산으로 가장
근접하게 맞추어 엔리코 페르미가 칭찬했다"는 것은 외국의 작가가 만들어낸 소설로 실은
엔리코 페르미가 가장 근접하게 맞혔다고 합니다.
노이만 뿐 아니라 대체로 많은 위인들이 그들의 업적과 관련된 일화에서
사실무근인 경우가 허다하니 무조건적으로 믿지는 말고,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릴 때, 부유했던 집에서 파티를 하면 전화번호부를 통째로 외워서 읽어주는 묘기를 하였으며,
머리도 비상한 데다가 금수저이기까지 하다 또, 파티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이름, 주소, 전화 번호를 물어보고 집에 갈 때 문 앞에서 한 명씩 인사하면서 저 정보를 다 읊어줬다고 합니다.
7개의 외국어를 모국어같이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발음도 원어민과 흡사하였으며, 어릴 때 영어를 배웠지만,
미국에 오면서 좀 더 수준을 높이기 위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통째로 외우기도 했습니다.
유진 위그너는,
노벨상을 받을 때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존 폰 노이만이란 말을 했습니다.
기자가 위그너에게 “왜 헝가리에는 그렇게 뛰어난 천재가 많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이 질문에 위그너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천재가 많다니요?
천재는 오직 존 폰 노이만 한 사람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김나지움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어느 연구 기관이든 동료들은 그의 압도적인 천재성을 인정했으며,
신기하게도 나이를 먹을수록 계산력과 암기력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뛰어난 수학자였던 포여 죄르지는 취리히 대학에 다닐 적 폰 노이만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예전에 그가 있던 클래스에서 강의할 때, 어떤 정리를 소개하고 아직 증명되지 않았으며,
아마 꽤 어려울 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폰 노이만은 5분 후 가만히 손을 들더니 칠판에 나와 증명을 바로 써 내려갔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폰 노이만을 두려워했다”라는 말을 남겼다. 비슷한 일화로,
한 교수가 증명되지 않은 정리를 수업에 설명했는데,
수업이 끝나고 폰 노이만이 증명한 종이를 들고 찾아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동료가 어릴 때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읽은 《두 도시 이야기》를 암송해보라고 하니까
멈추라고 할 때까지 30분 가량 외웠다고 합니다.
동료 물리학자인 에이브러햄 파이스는 맨해튼 계획 후 오펜하이머 사건 때,
존 폰 노이만과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안 좋은 사이를 보며
오펜하이머가 폰 노이만의 재능에 대해 질투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고 서술했습니다.
냉정하게 보자면,
오펜하이머와 폰 노이만의 갈등은 오펜하이머의 일방적인 질투가 아니라,
원자폭탄의 실전 투입에 대한 두 사람의 대립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오펜하이머는 원폭의 실전 투입을 반대했고,
오히려 폰 노이만이 실전 투입을 주장하는 강경파였다고 합니다.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던 과학자 및 수학자들은 모두 반강제로 감금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유일하게 폰 노이만만이 너무나 일이 많아 출입이 자유로웠다고 합니다.
그가 외출을 했다 돌아오는 때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막힌 부분을 들고 찾아갔고,
그러면 폰 노이만은 마치 볼링핀을 쳐 넘어뜨리듯 문제를 해결하거나 실마리를 찾았다고 합니다.
괴팅겐에서 다비트 힐베르트의 초청으로 강의를 하게 되는데,
양자 역학의 형식주의에 힐베르트 공간을 도입한 인물은 힐베르트가 아니라 폰 노이만입니다.
만악의 근원 폰 노이만은 수학을 논리학으로 귀속시키려는,
버트런드 러셀과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시도를 냉소했고,
수학의 한 이론의 무모순성을 증명 체계 속에서 증명하려는 힐베르트의 시도에 역시 회의적이었습니다.
전자의 시도는 다수의 수학자들에게 별 관심을 끌지 못했고,
후자의 시도는 쿠르트 괴델의 등장으로 불가능함이 밝혀졌습니다.
실은 폰 노이만 역시 괴델의 아이디어를 이미 생각해 본 적이 있었으나,
힐베르트에 대한 존경심으로 그의 시도를 도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했을 때,
그 자리에서 바로 이해한 사람도 노이만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정리 직후 노이만이 한 말은 '다 끝장났군요!'였다. 그야말로 정곡을 찌른 표현이었습니다.
또, 위의 물리학자가 쓴 일화로, 또 다른 뛰어난 수학자 친구가 며칠 동안 밤을 새서 푼 문제를 갖고
폰 노이만에게 장난을 치려고 문제를 풀었다는 것을 숨긴 채 같이 문제를 풀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폰 노이만이 문제를 순식간에 술술 풀어나가고 동료 수학자가 밤을 새워서 풀었던
가장 어려운 부분만 남겨놓자 화난 수학자가 답을 말하고 나가 버렸습니다.
1분 후, 폰 노이만은 그가 말한 답이 옳다고 말한 뒤 30분 동안 어떻게 자신보다 빨리 풀었는지
고민하다가 물리학자가 사실을 이야기해 주자 그제야 웃으면서 밥 먹으러 갔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에이브러햄 파이스는 폰 노이만보다 위대한 인물은 만나 봤지만,
그보다 더 똑똑한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으며, 이는 그의 동료들도 동의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에이브러햄 파이스는 천재들의 시대에서 유명한 천재란 천재는 다 만나 본 사람입니다.
폰 노이만이 자문을 해주었던 군사 협력 업체에서 복잡한 계산이 필요해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고민하다가, 폰 노이만한테 물어봤는데...
그는 '컴퓨터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라며 잠깐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보더니
종이에 몇 줄의 식으로 완벽한 해답을 내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제 밥 먹으러 갑시다' 라고 말했다는 훈훈한 일화도 있습니다.
누군가
“200마일 길이의 철로의 양쪽 끝에 서 있는 두 대의 기차가 시속 50마일의 속도로 서로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이때부터 두 기차가 서로 충돌할 때까지 파리가 시속 75마일의 속도로 두 기차 사이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파리가 이동한 거리는 모두 몇 마일일까요?”라는 질문을 폰 노이만에게 했습니다.
폰 노이만은 잠시 생각한뒤 150마일이라고 대답했다.
질문을 한 사람은 실망하면서 “역시 당신은 속임수에 걸리지 않는군요.
대개 사람들은 이 문제를 무한급수를 이용해서 풀려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 매우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간단한 논리를 이용해서 파리가 2시간 동안 움직인 거리를 알아내면 금방 풀리죠.
당신은 그렇게 풀어낸 거죠?” 폰 노이만은 대답했습니다. “아뇨. 무한급수로 풀었는데요.”
이 문제는, 고등학교 이과 수학의 등비수열 수준의 문제이나, 폰 노이만이 무한급수를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머릿속에서 초항부터 계산해서 전부 더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후에 리처드 파인만도 동일한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파인만은 이미 폰 노이만의 일화를 알고 있었기에 쉬운 풀이로 답을 구해놓고
"무한급수로 풀었는데요?"를 시전하는 능청을 부렸으며,
참고로 파인만도 대단한 천재였지만 폰 노이만과 같이 살아있는 컴퓨터처럼
암산을 하는 타입의 천재는 아니었습니다.
ICBM(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의 초창기,
개발자들은 완전히 맨땅에서 시작했기에 탄도 미사일이라는 것이 어떤 물건이 될지
개발 과정이 맞는지조차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이 와중에 누군가 '노이만에게 물어보자' 백과사전 노글고 제안했고,
개발자들은 몇 개월간 연구한 수천 페이지의 문서를 들고 그에게 찾아갔는데...
노이만은 그들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개발자들이 "그럼 얼마 후에 방문하면 될까요?"하고 물어보자
"아, 거기 잠깐만 앉아 보세요."하고 말하며,
2시간 동안 자료를 뒤적거리다가 종이와 펜을 들고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설명은 완벽했다고 합니다.
위의 것과 동일한 미사일의 개발 도중,
한 학자가 수백 장의 보고서를 들고 폰 노이만에게 찾아갔습니다.
폰 노이만은 보고서를 앞 장을 빠른 속도로 읽고 갑자기 뒤에서부터 대충 몇 장 넘기더니
"이 구상은 너무 허무맹랑한데요, 사람 손으로는 불가능하고, 신이라도 쉽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고,
곧바로
그 이유에 대해 완벽히 설명해 주었으나,
그 학자는 납득하지 못하고 노이만을 이겨보겠다는 욕심에
2달이나 더 매진하고는 그제서야 진짜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말년에 폰 노이만은
“현대 수학은 매우 복잡합니다.
당신은 과연 현대 수학을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노이만은 이 질문에는 그답지 않게 한참을 매우 신중하게 생각했다가 “28퍼센트.”라고 대답했는데...
여기서 ‘고작 28%?’라고 의문을 품기 전에 잘 생각해 보면...
대개 ‘알면 알수록 자기가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것이 학문의 길인데,
학자인 폰 노이만이 ‘나는 안다’고 과신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모른다’고 겸손을 떤 것도 아니라
찬찬히 생각한 뒤에 저렇게 구체적인 비율을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은 나는 수학이라는 학문의 100%가
어느 정도인지 윤곽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대답입니다.
이렇게 너무나 놀라운 재능을 가진 그를 두고 주변 사람은 혹시 그가 악마가 아닐까 의문을 제기했지만,
그 의견은 동료 수학자가 단 한마디로 반박해버렸습니다.
“악마가 인간을 연기한 것이라면, 그렇게 연기를 못 할 리가 없다.”
엔리코 페르미의 부인은 엔리코 페르미의 부인은
“요니(노이만의 애칭.Johnny)는 뒤에서 험담을 듣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사교적, 재능적 면에서 흠을 잡기는커녕 완전무결했기 때문입니다.
아내와 영화를 볼 때면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나오는 뉴스는 정말 집중해서 봤으나,
막상 영화가 시작하면 자 버렸다고 합니다.
그 후 나와서 아내가 영화에 대해 물어보면 봤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즉석으로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하며,
매우 흥미로운 스토리였지만, 영화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합니다.
책 리만 가설을 보면 폰 노이만은 여자와 스포츠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위인이라고 나오는데,
비서의 책상 앞부분을 없애놓고 가끔씩 허리를 숙여 비서의 치마 속을 보는 취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그것을 눈치챈 비서가 조용히 마분지로 책상 앞을 가려 놓았다고 합니다.
폰 노이만의 운전 실력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가 차로 나무를 들이받은 뒤 경찰이 오자,
"길가의 나무들이 일정한 속도로 내 옆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무가 내 앞에 나타났다.(...)" 라고 진술했다.
인생의 대부분을 불가지론자 혹은 냉담자로 살았지만,
죽기 직전 암으로 투병 중에 가톨릭에 귀의하여 가톨릭 신자로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주변 인물들에 따르면 이러한 개종은,
평소 건강할 때의 발언이나 태도와는 사뭇 동떨어진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병자성사를 집전한 신부에 따르면,
그 자신은 개종으로 그다지 큰 위안을 받지는 못했다고 하며,
이미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노이만은 가톨릭에 귀의하면서, 파스칼의 내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암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의 동생이 파우스트 독일어 원문을 읽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생이 읽다가 잠시 멈췄을 때, 폰 노이만이 다음 구절들을 읊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의 기억력에 관련된 마지막 일화입니다.
기술적 특이점에 대해 최초로 언급한 사람도 폰 노이만입니다.
정확히는 동료였던 스타니스와프 울람(Stanisław Marcin Ulam)이
1958년 폰 노이만의 사후에 그에 대해 회고하며 쓴 글에서 언급되었는데
"기술의 항구한 가속적 발전으로 인해 인류 역사에는 필연적으로 특이점이 발생할 것이며,
그 후의 인간사는 지금껏 이어져온 것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합니다.
별명 중에 반신(半神, Demigod)이 있다.
두뇌가 인간의 영역이 아니란 소리. 프린스턴 대학에서 떠도는 농담 중
"폰 노이만은 인간이 아니고, 인간에 대한 세밀한 연구를 하고 완벽히 모방할 수 있는 반신이다."가
있다고 합니다.
노이만은 디지털 컴퓨터의 개발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지만 컴퓨터는 늘 거대해야 하고,
핵무기를 만들고, 기후를 통제하는 데에만 유용하다고 여겼습니다.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했던 건지,
모든 곳에 컴퓨터가 내장될 미래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후덕한 몸매 때문에 그의 아내가 "이런 수학천재도 칼로리는 계산하지 못 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자기계발 > 읽어보는 잡학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군함도"라 불리는 일본의 섬 "하시마 탄광" (0) | 2021.05.20 |
---|---|
범죄를 밝혀내기 위한 수사 방법 "포렌식 [Forensic]" (0) | 2021.05.11 |
과민성대장증후군이란? (0) | 2021.05.07 |
미닝(Meaning)과 커밍아웃(Coming out)의 합성된 "미닝아웃" (0) | 2021.05.06 |
격리와 경제를 합성한 "큐코노미"란? (0) | 2021.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