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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사소한 궁금증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by 모모파크 2020.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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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미야모토 무사시는 1584년 검객 신멘 무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미마사카 국, 하리마 국 등의 설이 있다.

 

무사시가 저술한 『오륜서(五輪書)』에는 하리마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에도 시대 후기의 지리서인 『동작지(東作誌)』에는 미마사카 국에서 태어났다고 적혀 있다.

 

미사사카 국이 현재의 오사야마 현 북동부에 해당되는 지역이며,

동으로는 하리마 국과 연결되어 있어 출생지에 대한 혼란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출생년도도 불확실하나 『오륜서』에 1643년에 60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1584년생이라 생각된다.

 

 

어릴 때는 시치노스케, 도모지로 등으로 불렸다. 

아버지 신멘 무니는 도리류(當理流) 검법을 창시한 인물로,

무사시는 어려서부터 이 검법을 배워 전국을 방랑하였고,

나중에 외가 쪽의 성을 사용하여 미야모토 무사시라고 칭하였다.

 

무사시의 저서인 『오륜서』에는 ‘나는 어려서부터 병법에 심취하여 13세 때 처음으로 승부를 겨루었으며,

21세 때 교토에 와서 천하의 병법자를 만나 몇 번 승부를 겨루었지만 승리를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 후 각국 곳곳에서 각류의 병법자와 만나 60여 차례 겨루었지만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이것이 13세부터 28~29세 때의 일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후세에 알려진 요시오카 기요쥬로,

사사키 고지로와의 대결 등이 모두 이 기간 중의 이야기이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인 간류지마(巖流島) 의 결투

 

간류지마의 결투(巖流島の決闘)로 알려진 고지로와의 결투는, 후나지마(후에 간류지마로 불림)에서 벌어진 것으로, 이 결투에서 고지로는 무사시의 죽검에 의해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30세를 넘어서는 자신의 검법에 대한 반성을 시작하였고, 50세경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검법의 도를 체득한다.

 

 

 

 

 

 

 

  구마모토 번에서 자리를 잡다  

1634년에는 규슈의 고쿠라에 가서 번주인 오가사와라 다다자네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시마바라의 난 진압 시 양자인 미야모토 이오리와 함께 참가하였다.

 

1640년에는 구마모토 번주 호소카와 다다토시의 초대로 구마모토로 옮겨 번사들을 지도하였고,

『병법35개조』를 저술하여 번주에게 올리기도 하였다. 검술뿐 아니라  번사들과 함께 연가(連歌), 그림, 다도 등을 즐겼다고도 전해진다.

 

구마모토 번에서는 영지 3백 석과 17인 후치(扶持, 1인을 고용할 수 있는 양의 쌀)를 받고

중견 가신에 해당하는 오구미가시라(大組頭)로 대접받았다.

 

1643년 자신의 병법을 종합한 『오륜서』를 저술하였고, 1645년경부터 급속도로 체력이 떨어지면서는

말년에 자신을 돌아보고 느낀 점에 대한 훈계서인 『독행도(獨行道)』를 저술하였다.

 

이 책을 저술하고 며칠 후 62세로 무사시는 사망한다.

생전에 태승사(泰勝寺)의 하루야마 화상에게 니텐이라는 법호를 받았으며, 구마모토 시 다키다쵸에 있는 무사시즈카(武蔵塚)가 무사시의 묘로 알려져 있다.

 

 

 

미야모토 무사시(1582~1645)의 나라 일본의 수많은 검객들 중에서도 단연 첫손에 꼽히는 인기를 누리는

국민적 영웅으로 일본에서는 검성으로 불리며 추앙받는다.

 

 

초기 에도시대의 전설적인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는

1582년 그가 태어나던 해에 다케다 가쓰요리가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할복하여, 석달 뒤에는 오다 노부나가가 자살하면서 군웅할거의 전란은 점차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치열했던 군웅할거 시대에 끝자락을 잡고 태어난 그였기에 한평생 일관되게 싸움에 직면할 수 있었고,

스스로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는 일평생 60여 차례의 결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13세 어린 나이에 아리마 기헤이와 대결해 생애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무사의길로 접어들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검법을 연마했다.

 

 

 

 

 

 

 

 

19세 때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으며,

21세에 교토로 상경했다가 다시 천하를 돌아다니며

29세가 될 때까지 다른 유파의 쟁쟁한 고수들과 60여 차례 결투했고,

단 한 번도 패배를 맛본 적이 없었다.

 

1612년 간류 섬에서 사사키 고지로와 대결해 승리를 거두고,

이를 끝으로 더는 결투를 벌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4세에는 오사카 여름전투에 참전했으며,

1638년 시마바라의 난이 발생하자 무사시는 당시 57세의 나이로 출전했다.

 

1643년, 62세가 된 무사시는 관음신앙의 성지로 유명한 레이간도에 기거하며

『오륜서』를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죽기 1년 반 전의 일이었다.

 

죽음을 직감한 무사시는 전쟁을 접하지 못한 후세들에게 병법을 전수하기 위해

자신의 병법을 글로 남기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집필하던 도중에 병을 얻어 1645년 5월 19일, 6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되고,

미완성된 『오륜서』는 『병법 35개조』, 『독행본』과 함께 그의 제자들에게 양도되었다.

 

무사시는 누구나 문무를 두루 겸비하고 병법을 지탱해줄 기예를 두루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무사시는 병법자로서 아카시 성의 토지 계획을 시행하는가 하면,

그림과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화가로서 <고목명견도>, <포대관투계도> 등 예술작품을 남겼는데

그림의 일부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오륜서  

전설적 CEO인 잭 웰치가 『오륜서』를 위대한 세계적 군사이론, 나아가 경영전략서로 극찬한 데는 이유가 있다. 하버드대학 MBA와 미 육군사관학교의 교재로도 쓰이는 『오륜서』는 단순한 검법서나 병법서의 차원을 넘어, 그리고 시공간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삶과 승부의 세계, 경영의 세계에 대한 본질을 통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륜서』는 목숨을 건 진검승부의 세계에서 이기고 살아남은 검성 무사시의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위대한 고전이다.

 

단순한 칼잡이가 아니라 서화와 조각에 능한 예술가이자 불교와 노장사상을 깊이 이해한 철학자이기도 했던 무사시는 육체적 무기인 칼의 세계를 정신적 문화인 도의 경지로 고양시켰다.

 

이런 배경에서『오륜서』는 명실상부한 동서양 고전의 반열에 올랐고, 21세기 서양 지식인들과 기업인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애독되고 있다.

 

무사시의 위대함은 통념화된 관념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성찰을 통해 칼과 전투에서 출발해 보편적인 사상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 있다.

 

칼과 무사의 전통이 강한 일본에서 역사상 최고의 사무라이로 인정받는 미야모토 무사시

전국시대 말기에 태어나 도쿠가와 막부 초기에 생을 마감했다.

 

불패의 검객이었던 무사시는 터득한 검법을 고도의 정신성으로 승화시킨 『오륜서』를 남겨 검도의 원조가 되었다.

 

 

 

『오륜서』에는 무사시의 검법 정신, 자기 수련, 승리 전략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륜서』의 소재는 칼싸움에서 상대를 먼저 베는 검법이지만, 핵심주제는 몸과 마음을 수련해 승리에 이르는 전략과 리더십, 생존을 위한 자기수련이다. 무사시는 칼싸움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출발해 승부사의 사생관, 개인은 물론 조직의 리더로서 상대방을 이기는 전략, 심신을 갈고 닦는 자기계발에 이르는 폭넓은 주제로 확장한다. 단순한 고전이 아니라 현대인들과도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대목이다.

 

 

사무라이의 나라 일본의 수많은 검객들 중에서도 단연 첫손에 꼽히는

인기를 누리는 국민적 영웅으로 일본에서는 검성으로 불리며 추앙받는다.

 

무사시의 병법은 지식이 아니라 실천학이면서,

승부사의 본질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시대와 공간의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는다.

 

그것이 바로 『오륜서』를 위대한 고전이게 하는 핵심요인이다.

무심코 보면 이 책은 무사시의 검법과 적을 베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의미를 하나하나씩 짚어보면 우리의 현실을 비춰주는 거울이 된다.

약 60회의 결투에서 승리한 미야모토 무사시의 비법만을 담고 있는 듯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적이 바로 오늘날의 우리가 말하는 나와 경쟁하는 라이벌 혹은 성공을 위한 목표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무사와의 결투에서 살아남는 것과 오늘날의 사회에서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결국 같은 의미인 것이다.

 

 

 

 

 


 『오륜서』는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땅(地)의 장으로 기초를 위한 장이다.

경쟁 속에서 이겨 살아남아야 함을 처음부터 말하며, 병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2장은 물(水)장으로 1장에서 말한 병법을 기본으로 유연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유연성은 기초를 바탕으로 응용력을 기르고, 기본에 집착하지 않으며,

이기기 위해 생각을 다양하게 하는 것이다.

 

3장은 불(火)의 장으로 평정심을 다룬다.

장수가 갖춰야 할 리더십, 적의 심리를 이용한 전술, 나보다 강한 적을 상대하는 방법 등이 나온다.

 

4장은 바람(風)의 장으로 남을 통해 자신을 비춰보는 장이다.

무사시는 자신이 만든 니텐이치류만이 최고라 생각하지 않고 다른 유파를 통해 병법을 도를 되돌아보고,

무사의 기본에 대해 이야기한다. 

 

5장 하늘(空)의 장은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끊임없이 수련하는 것이 새로운 경지를 추구하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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