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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의 기원(起原)

 

족보(族譜)는  다른말로  보첩(譜牒)이라고도 하며  그 효시는  중국의  6조(六朝) 시대에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 처음이며,  우리나라는  고려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18대왕  의종(毅宗)때  

김관의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그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체계적인  족보의 형태를  갖춘 것은  조선 성종(成宗)때(1476) 부터이며, 

이때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가 처음 발간 되었다.  

 

혈족(血族) 전부를  망라한 족보는 조선 명종(明宗)때

편찬된 문화유씨보(文化柳氏譜)로 알려졌으며 지금까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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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첩(譜牒)의 종류(種類)

 

분류 보첩(譜牒)의 종류(種類)
대동보(大同譜) 같은 시조(始祖)아래  중시조 마다 각각  다른 본관(本貫)을 가지고 있는 씨족간에 종합 편찬된 족보이다.  다시말해서 본관은 서로 다르지만, 시조가 같은 여러 종족이 함께 통합해서  편찬한 보책을 말한다.
족보(族譜) 관향(貫鄕)을 단위로 하여  같은 씨족의 세계(世系)를 수록한 보첩으로, 한 가문의 역사를 표시하고  한 씨족의  계통도와  사적(事蹟)을 기록한 보첩이다.
세보(世譜) 두 개파 이상의  종파가 합하여  합보로  편찬한 보첩이다.
파보(派譜)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어느 한 파(派)만의  계보와  사적(事蹟)을  기록하여  편찬한 보첩
가승보(家乘譜) 본인을  중심으로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의 직계존속(直系尊屬 : 자기의 윗대)과, 비속(卑屬 : 자기의 아랫대)에  이르기까지  이름자와  사적(事蹟)을 기록한 것으로  보첩편찬의 기본이 되는  문헌이다.
계보(系譜) 한 가문의 혈통 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을 계통적으로 나타내는 도표로서, 한 씨족 전체가 수록되었거나  어느 한  부분이 수록된 것이다.
가첩(家牒) 편찬된 내용이나 표현이 아니라  집안에 소장되어 있는 모든 보첩을 말한다.
만성보(萬姓譜)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라고도 하며, 모든 성씨의 족보에서 큰 줄기를 추려 내어 집성(集成)한 책으로 족보의 사전(辭典) 구실을 하는 것이다.

 

 

 

 

족보 용어

 

분류 용어 설명
시조(始祖) 제일 처음의  선조로서  첫 번째 조상
비조(鼻祖) 비조는 시조 이전의 선계조상(先系祖上) 중 가장 높은 사람을 말한다.
중시조(中始祖) 시조 이하에서,  쇠퇴한  가문을  일으켜 세운  조상으로서,  
모든 종중(宗中)의  공론에 따라 추대된 조상
세(世)와 대(代) 시조를 1세(世)로 하여 아래로 내려갈 경우에는 세(世)라 하고,
자신을 빼고 아버지를 1대(代)로 하여 올라가며 계산하는 것을 대(代)라 한다.

자(字)와 호(號) 시조를 1세(世)로 하여 아래로 내려갈 경우에는 세(世)라 하고,
자신을 빼고 아버지를 1대(代)로 하여 올라가며 계산하는 것을 대(代)라 한다.

함(銜)과 휘(諱) 지금은 이름을 하나로 부르지만  옛날에는 여러 가지로 불렀는데,
어렸을 때 부르는 이름을 아명(兒名)이라 하고,  20세가 되어  성인이 되면  다시 관명(자)을 지어주었다.
호(號)는 낮은 사람이나 또는 허물없이 부르기 위하여  별도로 지어 불렀다.

함(銜)과 휘(諱) 살아 계신 분의 이름을  높여서  부를 때  함자(銜字) 라고 하며  극존칭으로서  존함이라고 한다.  
그리고 돌아가신 분에 대하여는  
휘자(諱字)라고 하며,  
여기에는 이름자 사이에  자(字)를 넣어서  부르거나 글자 뜻을 풀어서 말하는 것이 예의이다.
항렬(行列)

항렬이란  같은 혈족사이에 세계(世系)의 위치를 분명히 하기 위한 문중의 법이며,
항렬자란  이름자 중에 한 글자를 공통적으로 사용하여  같은 혈족 같은 세대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돌림자라고도 한다.  


항렬은 가문과, 파(派)마다  각기 다르게 적용하나 대략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정한다.

※ 십간(十干) 순으로 쓰는 경우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

※ 십이지(十二支)순으로 쓰는 경우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

※ 오행상생법(五行相生法)으로 쓰는 경우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의 변을 사용하여 순서적으로 쓰는 경우인데,  
    이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

 

 

 

 

 

가스라이팅 유래ㆍ유형ㆍ학대방법

 가스라이팅 [ Gas Lighting ]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로, <가스등(Gas Light)>(1938)이란 연극에서 유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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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변만 보고도 병을 알아 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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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신체 특정 부위만 살이 찔까?

 왜 신체 특정부위만 살이 찔까? 몸을 따뜻하게 해야 혈액순환이 잘 돼고 몸이 건강합니다. 혈액순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두통, 수족 냉증, 손발 저림, 변비부터 성인병, 뇌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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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나무와 조팝나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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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가도 [ 征明假道 ]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조선 정부에게 강요한 내용.

곧, 일본군이 명을 침략하고자 하니 조선은 명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것입니다.

 

조선 선조 때에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정부에 대하여 중국 명나라를 치는  필요한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한 .

선조 24(1591) 3월에 통신사 편에 보내온 도요토미의 서신 가운데 들어 있었다고 하는데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치자는 것이었으나 조선은 단호히 거절하였으며, 

이것을 빌미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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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 壬辰倭亂 ]

조선 선조 25년(1592)에 일본이 침입한 전쟁.

선조 31년(1598)까지 7년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침입하였으며,

1597년에 재침략한 것을 정유재란으로 달리 부르기도 합니다.

 

 

 

 

정유재란 [ 丁酉再亂 ]

조선 시대에, 임진왜란 휴전 교섭이 결렬된 뒤,

선조 30년(1597)에 왜장(倭將)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이 14만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와 일으킨 전쟁.

이순신 등의 활약으로 큰 타격을 입은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자 철수하였습니다.

 

 

 

정리를 하면,

조선시대 선조((1591년) 때, 일본이 명나라를 침략 전쟁을 하기위해,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으로 가려하니, 명으로 갈 수 있게 길을 열어 달라는 내용을 조선에 보냈으나,

조선은 이를 단호히 거절을 함으로써,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진 빌미가 된 것입니다.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이 최초 일어난 선조 1592년 부터 선조 1598년까지 7년동안 두차례에 걸쳐 침략을 했는데,

1597년에 두번째 , 재침략을 한 것을 정유년에 일어나 정유재란이라 부릅니다.

 

즉, ​1592년 임진년에 왜구가 쳐들어오면서 발생한 임진왜란과 강화 협상으로 잠시 소강 상태가 된 후

강화 협상이 결렬되면서 1597년 정유년에 다시 전쟁이 재개되었기에 정유재란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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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를 즐겨보는 일인이지만,

매번 나오는 우화중에 ≪어우야담≫에 속해있는 이야기를 자주 접합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조선중기에 유몽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야담ㆍ설화집으로 나옵니다.

 

 

 

   어우야담 [ 於于野譚 ]   

 

조선 중기에 유몽인(, 1559∼1623)이 편찬한 야담 설화집.

 

유몽인은 광해군 10년(1618)부터 은둔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때에 야담()을 수집하기 시작하여 1622년에 ≪어우야담≫ 10여권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남으로 인해

유몽인은 역률()로 피체()되어 아들과 함께 주살() 당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문집()과 함께 ≪어우야담≫도 흩어지게 되어 이본()이 20여종이나 됩니다.

초록 번역한 구황실본()이 번역본이고,

나머지는 한문 필사본으로 전하다가 1964년에야 활판본이 출간되었습니다.

권수에서도 단권()에서 12권까지, 책수()에 있어서도 1~3책으로 다양합니다.

 

 

 

5권 1책. 활판본. 당초 10여 권이었으나,

저자가 모반의 혐의로 형사(刑死)됨에 따라 많이 산질되었습니다.

 

1832년(순조 32) ≪어우집 於于集≫을 발간하면서

종후손 금(琹)이 ≪어우야담≫의 유고를 수집하여 간행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 뒤에도 줄곧 필사본으로 전하여 왔는데,

필사의 과정에서 여러 종류의 초사본(抄寫本)이 나타났으며,  1964년 그의 종후손 제한(濟漢)이

가전의 잔존본에 여러 이본을 수집, 보충하고 부문별로 나누어 5권 1책으로 간행하였습니다.

 

책머리에는

유몽인의 영정과 유묵(遺墨), 이어 유영선(柳永善)의 서문, 성여학(成汝學)의 구서문(舊序文, 1621)과

연보를 실었으며, 책 끝에 종후손 제한의 발문이 붙어 있습니다.

 

 

 

   어우야담     내용   

 

내용은 1권은 인륜편으로,

효열·충의·덕의(德義)·은둔·혼인·처첩·기상(氣相)·붕우·노비·배우(俳優)·창기(娼妓),

 

내용 2권은 종교편으로,

선도·승려·서교(西敎)·무격(巫覡)·몽(夢)·영혼·귀신·속기(俗忌)·풍수·천명(天命),

 

내용 3권은 학예편으로,

문예·식감(識鑑)·의식·교양·음악·사어(射御)·서화·의약·기예·점후(占候)·복서(卜筮)·박혁(博奕),

 

내용 4권은 사회편으로,

과거·구관(求官)·부귀·치부·내구(耐久)·음덕(陰德)·붕당(朋黨)·무망(誣罔)·고풍(古風)·외임(外任)·

용력(勇力)·처사(處事)·구변(口辯)·오기(傲忌)·교학(驕虐)·욕심·재앙·생활고·도적·해학,

 

내용 5권은 만물편으로,

천지·초목·인류·금수·인개(鱗介)·고물(古物) 등으로 분류, 수록하였습니다.

 

 

흥미성은

기이(), 신기(), 해학(), 풍자() 등에서 찾을 수 있는데,

반전()의 구성을 통해 그 효용을 배가시키고 있음이 특징입니다.

이는 후대 이러한 유형의 저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또한 야담집이 형성되게 되는 근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신변잡기나 야사에 해당하는 작품도 있으나,

단지 사실 기록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모순점에 대한 풍자가 많았으리라 판단됩니다.

 

그리고 후대의 야담집 서문에 거의 대부분 등장하고,

또 이러한 유형의 작품집 중 이본이 가장 많다는 점에서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인간 생활의 여러 방면에서 야사·항담(巷談)·가설(街說) 등이 수록되었는데,

흔한 음담패설이 아닌 풍자적인 설화와 기지에 찬 것들입니다.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문체로 임진왜란 전후의 생활상이 만화경(萬華鏡)같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성행한 야담류의 효시이며,

설화 기술이 과감하고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는 설화문학집입니다.

 

또한,

책에는 탄탄한 서사적 구조 속에 빼어난 문학성을 담은 야담이 있는가 하면 전설이나 일화도 많습니다.

필기 기록에 해당하는 것들도 있으며, 시화와 고증잡록류의 기록들, 인물의 일화나 귀신담 등... 

여러가지가 뒤섞여 있으며, 이색적인  내용이 다채롭게 담겼습니다.

 

조선 후기에 성행한 야담집의 모델 중 하나라고 할 수는 있지만,

야담집이라 부르기에는 미흡한 설화집 혹은 필기집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필사본이 영남대학교도서관·국립중앙도서관·규장각도서 등에 있습니다.

 

그 밖에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필사본이 ≪해동시화 海東詩話≫ 안에 다른 책과 합철되어 있고,

규장각 도서인 필사본 ≪어우야담≫도 2책으로 다른 책과 합철되어 있습니다.

 

한글본 ≪어우야담≫이 1960년 2권 1책의 등사본으로 통문관(通文館)에서 간행되었는데,

구황실내전(舊皇室內殿)의 비장본이 저본으로서 역자는 미상입니다.

 

현재 찾아보니,

서점에 많은 ≪어우야담≫이 출판사 별로 발행되어 있습니다.

오늘, 선택하여 인터넷으로 주문할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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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계보 (1392~1910, 519년)

 

유교적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근세사회를 열었던 조선 왕조의 계보.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며 건국한 조선은

1910년 순종을 마지막으로 27명의 왕이 승계하면서 519년간 존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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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재위기간 간략 설명
1대 태조 1392-1398 이성계, 
조선의 제 1대왕
2대 정종 1398-1400 1대 태조의 둘째 아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로 책립.
3대 태종 1400-1418 1대 태조의 다섯째 아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사병을 없애고 관직 제도를 개혁함.
4대 세종 1418-1450 3대 태종의 셋째 아들. 훈민정음을 창제함.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과학,
음악 등 전 분야를 발전시켜 조선의 황금시대를 연 성군.
5대 문종 1450-1452 4대 세종의 맏아들. 
성품이 온화하고 학문을 좋아한 왕.
6대 단종 1452-1455 5대 문종의 아들. 
정치적 야심에 희생된 비운의 소년 국왕.
7대 세조 1455-1468 4대 세종의 둘째 아들(수양대군).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함.
8대 예종 1468-1469 7대 세조의 둘째 아들. 
재위 13개월 만에 죽음.
9대 성종 1469-1494 7대 세조의 손자.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완성함.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음.
10대 연산군 1494-1506 9대 성종의 맏아들이자 폐비 윤씨의 아들. 
조선 최초의 반정으로 폐위됨.
11대 중종 1506-1544 제9대 성종의 둘째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
관련 : 조광조, 기묘사화
12대 인종 1544-1545 11대 중종의 맏아들. 
성품이 온화하고 효심이 깊었던 왕, 재위 8개월만에 사망함.
13대 명종 1545-1567 11대 중종의 둘째 아들. 12세에 즉위.
관련사건 : 을사사화
14대 선조 1567-1608 11대 중종의 손자. 당쟁과 왜군의 침입에 휩싸인 왕. 
사림의 중앙정계 진출이 활발해짐. 붕당 형성.
15대 광해군 1608-1623 14대 선조의 둘째 아들. 
조선 중기의 격동기에 실리외교를 택한 군주. 대동법을 실시함.
16대 인조 1623-1649 14대 선조의 손자.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삼전도 굴욕을 겪은 왕.
17대 효종 1649-1659 16대 인조의 둘째 아들. 
북벌을 국시로 내세웠으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는 못함.
18대 현종 1659-1674 17대 효종의 아들. 
남인과 서인의 당쟁(예송논쟁)이 계속되어 국력이 쇠퇴해짐.
19대 숙종 1674-1720 18대 현종의 아들. 대동법을 전국에 실시함. 당쟁과 궁중암투가 극에 
달함. 관련인물 : 인현왕후, 희빈 장씨, 숙빈 최씨
20대 경종 1720-1724 19대 숙종과 희빈 장씨의 아들. 
노론과 소론 당쟁의 절정기.
21대 영조 1724-1776 19대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 붕당 대립을 완화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함.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의 군역 부담을 줄임.
22대 정조 1776-1800 21대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 탕평책을 계승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함. 조선 후기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고 평가됨.
23대 순조 1800-1834 22대 정조의 둘째 아들. 
11세에 즉위. 김조순 등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하던 시대로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힘들었음. 1811년 홍경래의 난 발생함.
24대 헌종 1834-1849 23대 순조의 손자. 
8세에 즉위.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권력 투쟁에 휘말림.
25대 철종 1849-1863 22대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의 손자. 
1844년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19세 나이로 즉위.
26대 고종 1863-1907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12세에 즉위.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
27대 순종 1907-1910 26대 고종의 둘째 아들. 
조선의 마지막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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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이란 무엇인가?

 

대장경이란 불교교리를 종합편찬한 성서로서 일체경(一切經)·삼장경(三藏經) 또는 장경(藏經)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삼장으로 구성된다.

 

삼장이란

인도의 고대언어인 산스크리트語(梵語)의 Tripitaka를 한문번역한 말로서 세 개의 광주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경장이란

부처님께서 따르는 제자와 중생을 상대로 설파하신 내용을 기록한 "경"을 담아 놓은 광주리란 뜻이고,

율장은 제자들이 지켜야 할 논리의 조항과 그밖에 공동생활에 필요한 규범을 적어놓은 "율"을 담은

광주리란 뜻이다.

 

 

 

논장

위의 "경"과 "율"에 관하여 스님들이 읽기 쉽게 해설을 달아 놓은 것으로서 " 논"을 담은 광주리란 뜻이다.  

팔만대장경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경판은 8만 1258판이다.

8만여 판에 8만 4000번뇌에 해당하는 법문이 실려 있으므로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팔만대장경 요약

 

대장경판의 재질은 자작나무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를 비롯하여 자작나무류,

후박나무류, 단풍나무류, 층층나무류, 사시나무등 여러 수종으로 제작되었다.

 

 

팔만대장경은 몽고 침략시기인 강화도에서 1237년(고종 24)부터 16년간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몽골군의 격퇴를 발원(發願)하여 대장도감(大藏都監)과 분사도감(分司都監)을 두어 만든 것이다.

 

 

 

경판고 안에 5층의 판가(板架)를 설치하여 보관하고 있는데, 판가는 천지현황(天地玄黃) 등의

천자문(千字文)의 순서로 함(函)의 호수를 정하여 분류·배치하고, 권차(卷次)와 정수(丁數)의 순으로

가장(架藏)하였다.

 

 

경판의 크기는 세로 24cm 내외, 가로 69.6cm 내외, 두께 2.6∼3.9cm로 양끝에 나무를 끼어

판목의 균제(均齊)를 지니게 하였고, 네 모서리에는 구리판을 붙이고, 전면에는 얇게 칠을 하였다.

 

 

판목은 남해지방에서 나는 후박나무를 썼고,

무게는 3∼4kg 가량으로 현재도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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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天地)의 계선만 있고, 각 행의 계선은 없이 한쪽 길이 1.8mm의 글자가 23행, 각 행에 14자씩 새겨 있는데,

그 글씨가 늠름하고 정교하여 고려시대 판각의 우수함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강화 서문(江華西門) 밖 대장경판고에 모셨으나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져서 서울의 지천사에 옮겼다가,

그 뒤 조선시대 1398년(태조 7)에 다시 현재의 위치 해인사로 옮겼다.

 

 

현재 이 팔만대장경과 경판고는

1995년 12월 석굴암·종묘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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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탕한 여자의 이름 "어우동"

 

현대엔 어째서인지 기생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조시대 어우동은 엄연히 양반 가문 출신이며 기생은 아닙니다.

 

연산군 일기에 어우동을 '구마'라고도 칭한 것을 보아 본명은 박구마(朴丘麻)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가족 관계로는 아버지는 승문원 지사 박윤창(朴允昌).

어머니는 정귀덕(鄭貴德).

오빠는 박성근(朴成根) 등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 당시 금기에 가까운 간통 사건을 일으켰기에

가문에서 파문되어 성을 뺀 자신의 별명인 어우동(於宇同)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1440년경 충청도 음성현(현 충북 음석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곱게 자란 뒤

왕손인 태강수 이동이란 자와 혼인을 했는데 이동은 아내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동은 이혼을 할 속셈으로 아내 어우동이 집에 온 은장이와 바람이 났다고 모함했는데,

조사 결과 무고로 밝혀져서 어우동과 재결합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그 명을 받지않고, 아내를 내쫓았습니다.

 

 

 

황당하게 소박을 맞고 홀몸이 된 어우동은 친정으로 돌아왔는데,

이때부터 수산수, 방산수를 비롯한 왕족들, 과거 급제자 홍찬 등 양반, 그 외에

양인과 노비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간통 행각을 벌였습니다.

 

이에, 어우동의 계집종까지 남성을 알선해주고,

심지어 어우동은 어린 소년까지 쾌락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우동과 같은 시대를 살아간 성현이 어우동 사건을 자세히 취급한 것에서,

이 사건이 당시 관료 사회에서도 큰 이슈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간통 대상 중 한 명이 간통 사실을 승정원에 신고했고,

그녀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남자를 사귀라고 옆에 꼬드긴 여종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연관된 고관대작들은 어우동의 사형 이후 재등용 되었다고 하며,

왕명으로 재등용이 되었어도 사람들의 비웃음과 소문을 견디지 못해 그만둔 이들도 여러 있었다고 합니다.

어지간히 뻔뻔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면 타인의 시선이나 수근거림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지만

꽤 많이 정계에서 남아 출세한 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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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면,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이나 수근거림, 또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인지...

권력은 도대체 뭐길래 한번 잡으면 놓치 않기 위해 아등바등 거리며 사는 것일까요?

 

사실 어우동은 간통죄가 아니라 강상죄로 처형된 것인데,

강상죄는 조선에서 패륜이나,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경우 정도에나 처벌받는 엄청나게 무거운 중벌이었습니다.

 

당시의 형벌인 대명률에 의하면 처녀총각의 간통은 장 80대,

유부녀의 간통은 그에 열대를 추가한 장 90대였습니다.

 

사실 조선 조정에서도 사건 자체는 그냥 간통이었기에 일반적인 간통 사건으로 처리하고자 했으나,

왕인 성종이 강상죄를 적용하라고 강하게 요구하고, 신하들이 반대했으나

결국 왕의 뜻을 꺾지 못해서 사형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그나마 진짜 강상죄가 아니라서 교수형으로 끝났고, 가족들도 연좌되지 않고 넘어갔다고 합니다.

 

 

양반 집안 출신의 여성이 양인을 비롯한 노비, 십여명과 정을 통한 희대의 간통 사건이라

사회의 파문이 컸다고 전해집니다. 

 

그러고보면,

왕을 교육할 때 정치를 잘하는 법보다

사람으로 군자로서 지켜야 할 덕목과 올바른 생각에 대해 먼저 교육을 시켰던것 같습니다.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싶다면 그 나은 사람이 되야 할 듯 싶고,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을 가진 사람이 되는게 중요한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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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와 보물 차이점  

같은 유형문화재인 국보와 보물의 차이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국보(國寶)는 ‘나라의 보물’이라는 뜻으로, 문화재 가운데 특히 가치가 큰 문화재를 가리킨다.

각 분류별로 보물의 가치가 있는 문화재중에서 시대를 대표하거나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으뜸인 것을

지정한 것이며, 문화재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하며,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는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된다.

 

 

보물( 物)은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큰 것으로서 국가가 법적으로 지정한 유형 문화재이다.

일반적인 보물지정 기준은 문화재이기 때문에 같은 수준의 것들이 많으며 지정수도 국보보다 많으며,

지정번호는 가치의 높낮이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고 지정순서를 말한다.

 보물의 지정과 함께 그것을 보호하는 시설물을 보호물로, 주위의 일정구역을 보호구역으로 지정할 수 있다.

 

 

 

 

 

 

국보

보물급의 문화재 중 국가가 법적으로 지정한 유형문화재이다.

지정대상은 목조건물·석조물·전적(典籍)·서적·고문서·회화·조각·공예품·고고자료·무구(武具) 등으로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가 커서 보물로 지정될만한 것 중에서 제작연대가 오래되고, 그 시대를 대표하며, 제작의 의장이나 기술이 가장 뛰어나고, 형태·품질·용도가 특이하며, 역사적인 인물과 관련이 깊거나 그가 만든 것 등이다.

 

보물

예로부터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보배로운 물건, 보재(寶財)·보화(寶貨)로서 건조물·전적(典籍)·

고문서(古文書)·회화(繪 )·조각·공예품·고고(考古)자료·무구(武具) 등의

중요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중 문화관광부장관이 문화재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지정·보호하는 문화재이다.

 

  국보와 보물의 차이점  

 

1.국보

법령에 의해 국가적인 보물로 지정된 최상급 유물이다.

 

국보의 지정기준에 대한 세부사항으로는

①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특히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가 큰 것,

②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제작연대가 오래되고 특히 그 시대에 대표적인 것,

③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제작의장이나 제작기술이 특히 우수하여 그 유례가 적은 것,

④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형태·품질·제재·용도가 현저히 특이한 것,

⑤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특히 저명한 인물과 관련이 깊거나 그가 제작한 것 등이다.

 

2.보물

유형문화재로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국보 다음으로 높은 문화재이다.

 

같은 유형문화재를 국보와 보물로 나눈 기준은

국보는 작품의 제작기술·연대 등이 각 시대를 대표할 만한 것으로서 보존상태가 양호하면서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높은 데 비해, 보물은 일반적인 지정 기준에 도달하는 문화재를 지정한 것으로

엄격한 구분은 불가능하다.

 

보물로 지정된 수는 국보보다 많으며,

지정번호는 가치의 높낮이를 표시한 것이 아니고 지정된 일련순서에 의해 붙여진 것이다

 

 

  ※ 참고  

 

사적(史蹟)

역사적으로 남아 있는 사건의 자취, 역사상의 유적(遺蹟)·고적(古蹟)을 말하며

기념물 가운데 역사적·학술적·관상적(觀賞的)·예술적 가치가 큰 것으로서 국가가 법적으로 지정한 문화재이다.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학술상·역사상 가치가 큰 동물의 종과 서식지, 식물의 개체·종 및 자생지, 지질 및 광물 등의

천연물로, 문화관광부장관이 문화재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이의 보호·보존을 지정한 것으로서

동물의 진돗개, 새의 고니·크낙새, 곤충의 장수하늘소, 식물의 백송·민선나무 등이 있다.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연극·음악·무용·공예기술·기타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 역사상·학술상·예술상 가치가 크고

향토색이 현저한 것으로 정부에서 지정한 문화재이다.

 

이는 관보에 고시하고 보유자나 단체에 인정서를 교부한 날로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중요무형문화재는 민족적 개성이 가장 뚜렷하고 예술적 감흥과 기술적 전통성을 강하게 계승시켜준다.

 

중요민속자료(重要民俗資料)

국민생활의 추이를 이해하는데에 불가결한 민속자료 중에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정부에서 지정한 문화재이다.

 

민속자료란 의식주·생업·신앙·연중행사 등에 관한 풍습·관습과 이에 사용되는 의복· 기구·가옥 등으로서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문화관광부장관이 중요민속자료로 지정한다.

지정의 효력은 관보에 고시한 날로부터 발생한다.

 

기념물(記念物)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보존하는 물건으로서 역사상으로 남아있는 패총(貝塚)·궁지(宮趾)·사지(寺址)·

고분(古墳)·성지(城地) 및 유물포함층 기타 사적지(史蹟址)와 명승고적·동물·식물·광물 등 예술적·학술적으로

또는 관상상(觀賞上)의 가치가 매우 큰 물건이다.

 

이 기념물 중에서 중요한 것을 문화재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문화관광부장관이 사적·명승 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수 있다.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건조물·회화·조각·공예품·서적·전적(典籍)·고문서 등 유형의 문화적 소산으로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높은 물건, 고고자료(考古資料)를 이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들을 국가지정문화재로 정하고

문화관광부장관은 문화재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이를 다시 보물과 국보로 나누어 지정하고 있다.

한편 지방의 문화재로 중요하다고 인정되는 것은 지방장관이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다.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

무형한 문화적인 재산, 곧 연극·음악·공예기술(工藝技術)

기타 무형의 문화적 소산 가운데서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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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갑자(六十甲子)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를 차례로 맞추어 쓴 것으로 60년을 일주(一週)로 한 것을 말한다.

 

즉, 십신장(十神將)=천간(天干) : 甲 乙 丙 丁 戊 己 庚 辛 壬 癸
십이지신(十二地神)=지지(地支) : 子 丑 寅 卯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 에서

 

 

천간(天干)은 그대로 두고 지지(地支)가 5섯번 돌면 60갑자(六十甲子)가 완성되는 것이다.

 

천간의 처음 글자인 甲자와 지지의 처음 글자인 子자를 시작으로 천간과 지지를 순서대로 배합하여

육십개가 조직되므로 갑자에서 시작하여 갑자로 돌아오기까지 60개의 조합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甲이 다시 돌아왔다는 의미의 환갑(還甲)이라는 용어도

자기가 태어난 해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경진(庚辰)년, 신사(辛巳)년, 임오(壬午)년, 계미(癸未)년, 갑신(甲申)년, 을유(乙酉)년 등으로 사용된 것은 물론, 월(月)이나 일진(日辰)에도 활용되었으며, 우리의 시간(時間)에도 활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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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1대 왕

태조

이 성계

나이

 72세

재위기간

6년 2개월 (재위 1392∼1398)

사망원인

중풍

 

조선의 제1대 왕(재위 1392∼1398). 우군도통사(使)로서 요동정벌을 위해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하였다.

 

막강한 권력으로 전제개혁을 단행하였고 신진세력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여

조선()을 세우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이성계는 본래 앓고 있던 병이 있던것은 아니였으나  아들놈들끼리 옥좌를 둘러싼 두차례의 내란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이후 태사왕으로 물러났지만 중풍이 악화되어 결국 붕어하게 된다.

그래도 이성계는 조선임금들중 장수한편에 속한다.

처음부터 왕이 아니였고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된터라 왕들이 받는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았을것이다.

왕위에 오를때는 이미 57세로 환갑을 바라보고 있을때였다.

 

 

조선의 제2대 국왕
국왕 정종
나이 62세 
재위기간 2년 1개월
사망원인 노환, 자연사 

 

조선 제2대 왕(재위 1398~1400). 제1차 왕자의 난이 수습된 뒤 왕위에 올랐으며,

재임 2년 후 보위를 이방원에게 양위하였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원래는 옥좌에는 욕심이 없었으나 이방원이 난을 일으켜 개국 공신들을 대거 숙청하고 

장남이였던 진안대군 이방우가 아버지가 역적이 된 사실을 부끄러워하며 산에 은거하자 

둘째였던 정종을 왕으로 앉힌다. 

한국사 대표적인 꼭두각시 군주중 한명이다.
이후 약 2년만에 이방원에게 자리를 내어주면서 상왕이 되었다.
그리고 편하게 여생을 즐기며 천수를 누리다 자연사했다.

 

 

조선의 제3대 왕
태종 이방원
나이 54세
재위기간 17년 9개월 (재위 1400∼1418)
사망원인 폐렴

 

 선 제3대 왕(재위 1400∼1418). 아버지 이성계 휘하에서 구세력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세자책봉에 불만을 품고 정도전 등을 살해하는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즉위 후, 의정부(), 삼군도총제부()를 설치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였고

최고의 법사()인 의금부()도 설치하였다.

 

태종은 형제들을 죽여가면서 옥좌를 차지한 대표적인 냉혈군주로 왕조의 기틀을 다졌던 왕이다.
태종은 재위 13년부터 관절염을 앓고 있었고 맨손으로 물건을 집을수도 없을정도였다.

 

이후 몇년뒤 사냥을 나갔다 복귀한뒤 갑자기 고열과 혼수상태에 빠져 급성 감염성 폐렴으로 붕어한다.

 

 

조선의 제4대 왕
세종 세종대왕 이도
나이 52세
재위기간 31년 6개월
사망원인 당뇨, 풍질, 부종, 임질 등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대표적인 위인으로 세종대왕은 온갖 질환을 앓고 있었다. 

말기로 가면 눈도 안보여 가까이에 있는 신하들도 구분을 못했다.


고기반찬을 매우 좋아했으나 이게 반대로 비만의 이유가 되어 운동은 하지 않고 

하루종일 앉아 책만 보다가 온갖 성인병이 걸린것으로 추정된다.

 

실록에만 나오는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허리디스크,비뇨장애,임질,수전증,풍질,당뇨합병증 등이 있다.

 

 

조선의 제5대 왕
문종 이향
나이 37세
재위기간 2년 (재위 1450∼1452)
사망원인 등창

 

 조선의 제5대 왕(재위 1450∼1452). 세종의 맏아들. 약 30년 간 세자로 세종을 보필했다.

《동국병감》,《고려사》등이 편찬되었다.

병제를 정비하여 3군의 12사를 5사로 줄였고, 병력을 증대시켰다.

 

문종이 처음부터 몸이 허약한 왕이 아니였으나 

옥좌에 앉자 거짓말처럼 세종 말기못지 않은 환자가 되어버렸다.


왜 갑자기 쇠약해졌는지에 대해선 여러 추측이 있는데 

문종은 지극한 효자로 어머니였던 소헌왕후가 세상을 뜨자 곁에서 지극한 3년상을 치렀고 

이후 얼마 되지않아 세종대왕도 붕어하니 문종의 몸이 버틸리가 만무했다.


왕위에 오른지 2년, 결국 등에난 종기로 인해 붕어하니 왕세자로 35년 왕으론 2년밖에 못산 비운의 왕이였다.

 

  

조선의 제6대 왕
단종 이홍위
나이 16세
재위기간 3년 (재위 1452∼1455)
사망원인 독살 or 타살

 

조선 제6대 왕(재위 1452∼1455). 문종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이 되었다.

이후 단종 복위운동을 하던 성삼문 등이 처형되고 서인으로 강등되어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다.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정통성이 가장 왕이였으나 숙부의 왕위욕심에 희생된 비운의 소년국왕이다.
단종이 왕위에 오를때는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이 혼자였을뿐이였다. 


결국 이것은 왕실의 큰 어른이 없으니

다른 종친을 제어할 존재가 전무했고 세조의 쿠데타로 이어진다.


이후 단종복위운동까지 실패하자 단정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갔고 거기서 독약을 받아 죽었다.

 

야사에는 독약을 올리던 신하가 차마 사약을 올리지 못한채 

단종 앞에 사약을 두고 그대로 엎드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야사에는 활의 줄로 목을 졸라 죽였다고도 전해진다.

 

 

조선의 제7대 왕
세조   이유
나이 50세
재위기간 13년 2개월 (재위 1455~1468)
사망원인 문둔병

 

조선 제7대 왕(재위 1455~1468). 세종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수양대군에 봉해졌다. 

문종이 사망하자 어린 단종을 제거하고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였다.


세조는 문종이 살아있을때만해도 쥐죽은듯이 조용히 지냈으나  
나이어린 조카가 왕위에 오르자 쿠데타를 결심한다  

그러나 세종이 단종을 데리고 다니며 신하들에게 눈도장을 제대로 찍어놓은 상태라 

세조의 지지기반은 굉장히 약했었다. 그 누구도 세조가 쿠데타를 일으키리라 생각을 못했다  

결국 최측근이던 김종서를 죽이러 갈때도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본인이 직접 부하들을 통솔하여 김종서를 쳤고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 

이후 세조는 죽을때까지 정신질환과 불면증 피부병에 시달리다 붕어한다.

 

 

조선의 제8대 왕
예종 이황
나이 19세
재위기간 1년 3개월 (재위 1468∼1469)
사망원인 급사

 

조선 제8대 왕(재위 1468∼1469)으로 재위 13개월 만에 죽었다.

재위 중 직전수조법(職田收租法)을 제정하여 둔전(屯田)의 민경(民耕)을 허락하였다.


급사하기 전날에는 "이제 종기가 좀 나아진거 같다" 라고 했지만 바로 그 다음날 급사하고 만다.   
그러나 엄연히 돌연사이기때문에 꼭 종기때문에 급사했다고 보긴 어렵다 . 


예종 역시 급사한것때문에 복상사로 죽었다고 설이 돌지만 정사는 아니다.   
예종도 효종처럼 사망 플래그가 있었는데 죽기 2~3달 전에 궁을 지키던 갑사 둘이서 새벽에 까치가 울자  

"까치가 밤에 울면 그 집 주인이 죽는다고하더라, 그런데 이 궁 주인 누구겠어?"  
"주상 전하잖아. 곧 위태로워질 거야"  
"그럼 누가 임금 되는데?"  
"영순군이 있잖아" 

라고 얘기를하다 주위에 있던 동료 한 명이 고자질하는바람에 둘다 능지처참을 당했다.   
신하들은 영순군도 죽이자곤 했으나 예종이 끝까지 거부해 무사할 수 있었다. 

 

 

조선의 제9대 왕
성종 이혈
나이 37세
재위기간 25년 (재위 1469∼1494)
사망원인 폐결핵, 합병증 

 

조선 제9대 왕(재위 1469∼1494).

조선시대때 신하들은 최고 명군을 꼽을땐 세종대왕이 아닌 성종을 뽑았다고 한다.   

 

성종은 술을 좋아했고 섹스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종기,설사,두통,요통등 다양한 질병을 앓다 폐결핵과 합병증으로 붕어한다.   

번외로 폐비윤씨는 신하들이 앞장서서 폐위한거 같지만 실제로는 개빡친 성종이 주도해서 죽였다.   
오히려 처음에는 신하들이 말렸고 2번째때 신하들도 등을 돌려 끌어내려졌다.   

 

이후 연산군은 진실을 알게되자 많은 대신들이 갈려나갔다.

 

성종은 재위 25년째인 1494년 음력 12월 24일에 38살의 나이에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사망했다.

죽은 후 서울시 강남구에 위치한 선릉(宣陵)에 매장되었다.

 

조선의 제10대 왕
연산군 이융
나이 29세
재위기간 11년 (재위 1494∼1506)
사망원인 역질, 화병

 

조선 제10대의 왕(재위 1494∼1506).

많은 신진 사류를 죽이는 무오사화를 일으키고 생모 윤씨의 폐비에 찬성했던 윤필상 등 수십명을 살해하였다.

또한 경연을 없애고 사간원을 폐지하는 등 비정(秕政)이 극에 달하여 결국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었다.


조선 최고 폭군으로 어머니 폐비윤씨의 죽음을 알게되자  미친듯이 폭주해 신하들을 학살했으며,

전국에서 여자들을 모아 섹스에 미쳐  정사를 멀리하다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


이후 강화도로 유배를 갔고 유배생활중 아들의 시사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며 괴로워하다 죽었다 .

 

 

조선의 제11대 왕
중종 이역
나이 56세
재위기간 38년 (재위 1506∼1544)
사망원인 노환

 

조선 제11대 왕(재위 1506∼1544).

연산군 시대의 폐정을 개혁하였으며, 조광조 등의 신진 사류(士類)를 중용, 왕도정치를 시도하였으나,

지나치게 이상적인 개혁방법이 훈구파의 반발을 초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신진사류를 숙청하였다.

 

이후 신사무옥(辛巳誣獄), 삼포왜란 등으로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였다.

 

중종반정이 말만 중종반정이지 중종이 주도한것도 아니고 신하들이 주도해서 택군하여 올린 왕이다.  
그래서 신하들의 힘이 굉장히 강했으며 이렇다할 질병은 없고 약한 왕권속에서 노환으로 붕어한다.   

 

그리고 성종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때 능이 도굴되어 시신없는 무덤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측에서 수교를 요청해올때 신하들은 

"저 미개한것들이 그렇죠 뭐 일단은 그냥 수교하죠"

라는 의견이 많아 결국 다시 수교를 하게된다.

 

당시 에도막부에선 전쟁을 일이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덤을 박살을 내버리며, 

조선과 수교를 적극적으로 원하고 있던터였다.

 

 

조선의 제12대 왕
인종 이호
나이 30세
재위기간 9개월 (재위 1544~1545)
사망원인 거식증, 합병증 

 

조선 제12대 왕(재위 1544~1545).

기묘사화로 폐지되었던 현량과를 부활하고 기묘사화 때의 희생자 조광조 등을 원통함을 풀어주는 등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으나, 병약하여 포부를 펴지 못한 채 31세에 사망하였다.


역대 27명의 국왕중 가장 재위기간이 짧으며 1년도 채 되지 않는다.  
즉위했을때부터 병약하였고 문정왕후의 도가 넘은 압박속에서 굉장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병약한 이유는 세자시절때 중종이 앓아눕자 5개월동안 지극정성으로 예법을 행하다.   
거식증까지 걸려 결국 즉위하고 9개월만에 붕어한것이다.

 

 

조선의 제13대 왕
명종 이환
나이 33세
재위기간 21년 (재위 1545∼1567)
사망원인 울화병, 급사

 

조선 제13대 왕(재위 1545∼1567).

중종의 둘째 적자(嫡子)이자 인종의 아우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 하였다.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이 을사사화를 일으켰으며 문정왕후 사후, 선정을 펼치려 노력하였다.

문정왕후의 치마폭속에서 벗어나질 못한채 20여년간 압박속에서 살았다.   
그러다 문정왕후가 죽자 드디어 기를 펴고 윤원형등 일파를 대거 숙청하나 급사한다.   

 

자신의 뜻을 펼치기엔 2년은 너무나도 짧은 기간이였다.   
기록에는 울화병이나 소화불량등을 앓고 있다고 나온다.

 

 

조선의 제14대 왕
선조 이연
나이 55세
재위기간 40년 (재위 1567∼1608)
사망원인 울화병, 자연사 

 

조선 제14대 왕(재위 1567∼1608).

처음에는 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국정 쇄신에 노력했고 여러 전적(典籍)을 간행해 유학을 장려했다. 

 

후에 정치인들의 분열로 당파가 나타나 당쟁 속에 정치기강이 무너져 혼란을 겪었다. 

재위 후반에 왜군의 침입(임진왜란 1592~1598)과  건주 야인(여진족)의 침입도 받았다.


선조는 최초의 방계 혈통의 왕으로 임진왜란으로 유명한 왕으로  
본래 앓고 있던 울화병이 임진왜란 정유재란등을 거치며 더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실어증에 걸리며 말년엔 새벽에 쓰러지기도 하다 향년 55세로 붕어한다.

 

 

조선의 제15대 왕
광해군 이연
나이 55세
재위기간 40년 (1608∼1623)
사망원인 울화병, 자연사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 동안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들을 대상으로 수 차례 옥사를 일으켰고,

외교에서는 실리외교를 선택하였다.

 

재위 15년간은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였다.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은 서인 김류()·이귀()·김자점() 등이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광해군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되었다.

 

이런 그의 정치적 태도는 결국 인조반정으로 축출되기에 이르렀고 끝내 묘호조차 갖지 못한 군주가 되었다.

 

뒷날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책략과 명분에 의해 패륜적인 혼군()으로 규정되었지만,

실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같은 반정에 의해 희생된 연산군과는 성격을 달리해야 한다.

묘호는 광해지군묘()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있다.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 이종
나이 53세
재위기간 26년 (재위 1623~1649)
사망원인 화병 노환 

 

조선의 제16대 왕(재위 1623~1649).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 정책을 썼다.

 

난국 속에서도 군제를 정비해 총융청 · 수어청 등을 신설했으며, 북변 방위와 연해 방위를 위하여

여러 곳에 진을 신설했다.

 

《동사보편》등의 서적도 간행되었고, 송시열 · 송준길 등의 대학자·대정치가가 배출되기도 했다.


병자호란으로 대중에게 너무나 유명한 왕으로 잘못된 상식으론  병자호란이 인조의 친명배금

때문에 일어났다고 알려져있지만 본래 이유는 청나라의 식량난 때문이였다.

   
청나라는 두차례 침입으로 조선에게 대거 약탈하여 기사회생하였고

이때 인조는 삼배구고두레까지 올리며 대굴욕을 당했다.


실제로 그 삼배구고두레는 머리를 땅에 있는 힘껏 빻는 그런게 아니므로 피가 났다라는 기록은 없다.   
이후 소현세자에게까지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고 임기내내 스트레스와 홧병에 시달리다 붕어한다.  

 

 

조선의 제17대 왕
효종 이호
나이 39세
재위기간 10년 (재위 1649∼1659)
사망원인 어의의 실수

 

조선 제17대 왕(재위 1649∼1659).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서의 8년간 볼모생활 중 그 설욕에 뜻을 두어, 즉위 후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의 강화 등에 힘썼다.

 

그러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청나라의 강요로 러시아 정벌에 출정하였다.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했고, 상평통보(常平通寶)를 화폐로 유통시키는 등 경제시책에 업적을 남겼다.

 

효종은 청나라에게 당한 수모를 겪기위해 북벌론을 주장했던 임금으로  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의 치료를 놓고

침을 놓아야한다는 의견과 놓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하던중 어의였던 신가귀가 침을 놓고

피를 빼내 상태가 호전되는듯이 보였으나  수전증때문에 혈관을 잘못 찔러 과다 출혈로 붕어한다.

   
그러나 신가귀는 현종의 배려덕분에 능지처참은 면하고 교수형으로 죽는다 

 

조선의 제18대 왕
현종 이연
나이 33세
재위기간 15년 (재위 1659∼1674)
사망원인 등창 및 합병증

 

조선시대 제18대 왕(재위 1659∼1674). 효종의 아들이다.

 

효종의 상례(喪禮)시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복상문제(服喪問題)에 서인의

기년설(朞年說:1년설)을 채택하고, 어머니 인선왕후가 죽자 2차 복상문제에서 남인의 기년제를 채택, 

재위 중 남인과 서인의 당쟁이 계속되어 국력이 쇠퇴해졌다. 

 

현종의 고질병은 안질과 피부병이였는데 재위기간 내내 온천을 찾았으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등창의 합병증인 패혈증으로 붕어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왕실에선 후손들이 귀해지기 시작한다.   
그마저 조선말기에는 왕들의 정통성이 이게 유교국가가 맞나 싶을정도로 개족보가 되었다.   

 

헌종대에 후사가 끊기자 철종을 앉혔는데 철종과 헌종은 7~8촌 지간의 먼 친척이였고  
 또 그다음인 고종과 철종도 7~8촌지간이으로 먼 친척이였다.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 이순
나이 58세
재위기간 45년
사망원인 심화증, 등창, 안질등

 

조선 제19대 왕. 대동법을 전국에 실시하여 실효를 거두었으며

임진왜란 · 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토지사업을 추진해 완결을 보았다.

 

주전을 본격적으로 실시해 상평통보를 주조, 중앙관청 및 지방관청 등에 통용하도록 했다.

영토 회복 운동을 전개했고 금위영을 추가로 설치하여 5영체제를 완결했다.


강력한 정통성으로 강한 왕권을 가진 왕이였다.  
무엇보다 원자-세손-세자를 거친것은 숙종과 단종뿐이였다.

(문종이 태어날땐 세종대왕이 왕세자가 아니였으므로 원자가 아니였다)


허나 강한 왕권을 휘둘렀던것도 강한 정통성도 있지만 그만큼 성격이 불같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때문인지 심화증 등창 안질 포만증 노인병등 여러 질환에 시달리다 죽었다. 

 

 

조선의 제20대 왕
경종 이윤
나이 35세
재위기간 4년
사망원인 급사

 

조선의 제20대 왕(재위 1720∼1724).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재위 동안은 노론, 소론 당쟁의 절정기였다. 자식이 없고 병약하여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세제(영조)로

책봉하였고 노론의 압박으로 물러날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

 

이후 소론의 지지로 다시 친정했으며 김창집 등 노론 4대신 등 노론 세력을 숙청한 신임사화가 있었다.


경종은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로 4년간 짧은 재위기간을 가진 왕이다.   
어려서부터 경종은 쇠약했었고 심한 우을증(실록에는 괴이한 질병이라고만 나옴)을 앓았다고 기록되있다.   

 

이후 영조가 올린 게장과 생감을 먹고 다음날 급사하였다.   
게장과 생감은 정말 상극인 음식으로 경종이 독살당했다라는 의혹에 불을 지피는 꼴이되었다.   

 

현대의학에서는 경종이 붕어 한달전에 장티푸스에 걸렸는데

이때 잘못된 음식(게와 생감)을 먹는바람에 합병증으로 붕어했다라는 주장이 있다.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 이금 
나이 81세
재위기간 51년 (재위 1724~1776)
사망원인 자연사

 

조선후기 제21대(재위:1724~1776) 왕. 이름은 이금(李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

숙종의 세 아들(景宗·英祖·延齡君) 중 둘째이며,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이다.

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이고, 계비는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장수했고 재위기간도 가장 길다.
장수의 비결은 소식을 했으며 잡곡밥을 주로 먹었으며 몸에 좋은 음식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영조는 역대왕들중 가장 많은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숭정원의 일기에만 무려 140번이 기록되있다.   
1년에 한번씩 받았다고 해도 140년이 걸리는데 영조는 1년에 몇번씩은 건강검진을 꾸준히 받은셈이다.   

 

또한 1년간 먹은 인삼의 수만해도 20개가 넘는다고 하니

한달에 한번씩 인삼을 먹는다해도 12개인데 한달에 몇개씩은 먹은셈이다.   

 

그렇게 장수로 살다 자연사했다.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 이산  
나이 47세
재위기간 24년 (재위 1776~1800)
사망원인 등창, 홧병

 

조선후기 제22대(재위: 1776~1800) 왕.  이름은 이산(李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莊獻世子, 일명 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비(妃)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실록에 기록된 정조의 공식사인은 등창이나 독살설이 굉장히 자주 언급되는 왕이다.   

 

암살론자들은 오회연교 등 정치적으로 격한 상황에서 정조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고 
첫날에는 연훈방 처방으로 효과를 보았다고 스스로 언급한 다음  이어서 연훈방을 처방했을 때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사실상 급사해버렸기 때문에 독살설 떡밥이 더욱 맹렬한 것 .

 

그러나 저건 그냥 설일뿐이고 양력 1800년 5월 30일에는  정조는 대전에서 신하들과 또다시 한바탕 논쟁을 벌였고,

끝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오늘부로 난 신하들과 일체 논의를 하지 않겠다!!" 고 폭탄선언을 한다.  


그리고 약 4주 뒤인 1800년 6월 28일, 정조는 붕어하기 직전에 벌어진 신하들과  역대 최고 갈등때문에 생겨난

극심한 스트레스가 정조가 이미 가지고 있던 질병을 악화시켜 1달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물론 실록에는 공식사인으로 등창이라 적혀있지만 그 외에 잔병들도 많이 적혀있다. 

 

1800년 6월에 49세의 나이로 죽자 그의 유언대로 융릉 동쪽 언덕에 묻혔다가

그의 비 효의왕후가 죽으면서(1821) 현륭원 서쪽 언덕에 합장되어 오늘날의 건릉()이 되었다.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이다.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1899년에 황제로 추존되어 선황제()가 되었다.

 

 

조선의 제23대 왕
순조 이공
나이 44세
재위기간 34년 (재위 1800~1834)
사망원인 패혈증, 변비

 

조선의 제23대 왕(재위 1800~1834).

김조순 및 외가 인물들의 권력 강화에 맞서 선왕의 여러 정책을 모범으로 국정을 주도하려고 노력하였다.

 

암행어사 파견,《만기요람》편찬, 국왕 친위부대 강화, 하급 친위 관료 육성 등의 방식으로

국정을 파악하고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려 했다.


순조는 소화기간이 좋지않아 변비로 많은 고생을 한 왕이다.   
순조 34년에 두통과 함께 변비가 찾아오자 결국 이것때문에 붕어하고 말았다.   

 

순조는 정치에 큰 뜻도 없었고 결국 안동김씨들이 권력을 차지하며 60년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조선의 제24대 왕
헌종 이환
나이 21세
재위기간 14년 (재위 1834∼1849)
사망원인 폐결핵

 

조선의 제24대왕(재위 1834∼1849).

8세에 즉위하여 순조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하였다.


헌종은 역대왕들중 가장 잘생겼다는 평가를 받는 왕으로  
어릴때부터 궁녀들과 잦은 섹스를 하다 폐결핵에 걸려 붕어했다.   


특이한점은 어진에 나와있듯이 이마에 점이 있었는데 

외할아버지도 똑같이 이마에 점이 있는걸로 영향을 받은듯 하다.  

 

 

조선의 제25대 왕
철종 철종
나이 32년
재위기간 14년 (재위 1849~1863)
사망원인 폐결핵

 

조선왕조 제 25대 왕(재위 1849~1863).

1844년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 궁중에 들어와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했으나 정치에 어둡고 외척인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했다.

 

일자무식에 강화도령으로 유명한 왕이나  
철종은 강화도에서 5년밖에 살지 않았고 글을 아예 모르는 까막눈도 아니였다.  


다만 안동김씨의 훼방질을 이기지 못하고 정사를 멀리하고 술과 여색을 탐하다 폐결핵에 걸려 붕어했다.   
헌종대에 인조부터 내려오던 직계혈통들이 모두 끊겨 어쩔수 없이 철종이 왕위에 오를수 있었다.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 이희 
나이 67세
재위기간 43년 (재위 1863∼1907)
사망원인 뇌일혈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재위 1863∼1907).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내정 간섭을 겪었다.

 

개화, 수구의 양파가 대립하였고, 병자수호조약, 한·미, 한·영수호조약 등이 이루어졌다.


고종이 붕어할때는 의문점들이 많아 독살설이 굉장히 많이 제기된다.

조선총독부에서는 공식적으로 뇌일혈이라고 발표했지만, 이완용의 명령에따라 고종에게

식혜를 전달했던 나인들 두명이 의문사했고 고종은 이 식혜를 먹고 붕어하였다는것이다.   

 

윤치호의 일기에서도 팔다리가 심하게 부어있었고 치아가 빠져있다고 기록되어있다.   

 

당시 고종의 비밀리에 해외망명을 추진하던 중이였으므로 더욱 독살설은 탄력을 받게된다.   
그러나 실제로 확인되거나 확정된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장 확인을 할려면 무덤을 파내야 하는데 여론이 허락할리 없다.  
독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는 당연히 이완용으로 거론되고 있다.  


고종이 일제에게 독살당했다라는 소문이 조선팔도로 쫙 퍼지자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조선의 제27대 왕
순종 이척
나이 52세
재위기간 3년 (재위 1907 ~ 1910. 8)
사망원인 심장병

 

조선의 제27대 왕(재위 1907 ~ 1910. 8)이자 대한제국 최후의 황제.

한일신협약을 체결했고, 이에 따라 일본인의 한국 관리(官吏) 임용을 허용하여

사실상 국내정치는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일본의 압력으로 한국군을 해산하였으며, 경제권·경찰권·군사권 등을 상실하게 되었고,

결국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와 함께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1907년 헤이그특사를 빌미로 고종이 이완용과 일제로부터 강제퇴위 당하자 허수아비로 옥좌에 앉게되었다.  

 

원래 한일병탄조약 각서에는 일왕과 순종이 서명과 어새의 날인이 필요한 '조칙'을 내리기로 했는데  
조약서에 국새를 찍었는데 조서에는 찍지 않았으므로 효력이 없다고 한다.  

 

지금 와서 효력이 없었다고 하는 건 의미가 없지만, 일본이 절차와 형식을 무시하고 그들의 뜻대로

병탄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마저 순종의 황후였던 순정효황후가 치마속에 옥새를 숨겼으나,

백부였던 윤덕영이 강제로 빼앗아 찍었다고 한다.

 

그렇게 무기력속에서 살다가 말년에는 심장병을 앓다 붕어하였다.   


그래서 터진게 3.1운동의 시즌2라고 할 수 있는 6.10 만세운동이지만

3.1운동처럼 전국적으로 확대되지는 못했다.   

 

 

[요약]  조선의 임금들은 평균적으로 23세에 즉위  평균 재위 기간은 19년 2개월 평균 수명은 만 4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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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景福宮)’이라는 이름과 함께 정도전

 

정도전은 [시경(詩經)]대아(大雅)편에 나오는

기취이주(旣醉以酒) 기포이덕(旣飽以德) 군자만년(君子萬年) 개이경복(介爾景福)

"이미 술로 취하고 이미 덕으로 배부르니 군자께서는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릴 것이다"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景福宮)"이라 지었습니다.

 

 

여기에는 새로이 조선이란 이름으로 개국된 나라가 대대손손 큰 복을 누려 번영하기를 바라는

조선왕조의 소망을 잘 반영하고 있던 것입니다.

 

또한 ‘경복궁(景福宮)’이라는 이름과 함께

정도전은 정전(正殿)인 근정전ㆍ편전(便殿)인 사정전ㆍ침전(寢殿)인 강녕전 등의 이름도 잇달아 지었다고 하는데

그 내력을 알아보겠습니다.

 

  근정전(勤政殿) :  

부지런 할 바를 알아 부지런히 정치하라!!

인왕산과 북악산을 병풍삼아 우뚝 솟아있는 조선 제일의 전각 근정전(勤政殿)

경복궁에서 제일 웅장한 이 건물은 왕의 즉위식ㆍ법령 반포ㆍ외국 사신 접견 등과 같은 국가의 중대한 의식을

거행한 신성한 장소 였습니다.

 

한마디로 "근정(勤政)"이란 부지런하게 정치하라는 뜻이며,

예로부터 나라를 통솔하는 자에게는 부지런함이 요구되었습니다.

 

이는 [서경(書經)] 에 "편안히 노는자로 하여금 나라를 가지지 못하게 하라" 는 뜻이 담겨 있어

이를 인용했으며, 정도전 역시 편안히 쉬기를 오래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들기 때문에

임금은 무릇 부지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모든 일에 부지런해야 함은 말할것도 없지만

특히 ‘부지런할 바’를 알아서 부지런히 정치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나라의 위급한 일이 생겼을 경우 지체하지말고 

신속히 달려가 난국을 수습하는 부지런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또한 정도전은 왕이 부지런 해야 할 것으로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

예로 들었다 합니다.

 

  사정전(思政殿) :  

생각하고 정치하라 근정전이 국가의 공식 행사를 치르는 정전(正殿)의 기능을 가졌다면

그 뒤편에 있는 사정전(思政殿)은 왕이 신하와 경연(經筵)을 하고 정무를 보는 집무실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사정(思政)"이란 생각하고 정치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서경(書經)]에서 이르기를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고 했으니

생각이란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슬기(智)를 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정도전은 백성들 중에는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한 사람이 섞여 있고

모든 일에는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임금이 된자가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펴야지만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고 일을 마땅히 처리할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정도전은 이 건물에서 왕이 매일 아침에 정사를 보고 조칙(詔勅)을 내려 지휘할때

한번 더 생각하기를 바라며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강녕전(康寧殿) :  

평안하고 건강 하라 편전(便殿)인 사정전의 뒤쪽으로는 왕이 식사를 하고 잠을자는 등

일상생활을 하던 사적인 공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왕의 침전(寢殿)인 이곳은 "강녕전(康寧殿)"으로 평안하고 건강 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에는 사람이 살면서 누릴수 있는 다섯가지 복(福)

즉 오복[五福]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세 번째가 바로 ‘강녕(康寧)’이지요 壽(수: 장수)ㆍ富(부: 부귀)ㆍ

康寧(강녕: 평안)ㆍ攸好德(유호덕: 덕을 좋아함) 考終命(고종명: 천명(天命)을 다함)의 다섯 가지 덕중

그 중간인 "강녕(康寧)"이 있어야만 나머지 복을 다 여밀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무릇 건강(健康)을 잃으면 모두 다 잃는 것임을 강조 하였으며, 정도전은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 때에도

마음을 바르게 해야 왕의 존엄이 세워지고 오복(五福)을 누릴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위(衛)나라 무공(武公)을 예로 들면서 무공은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행동하여 90세가 넘도록 오복(五福)을 누린 인물임을 강조 했다소 합니다.

 

한가하고 아무도 없는 왕의 사적인 공간에서도 스스로 경계하며

마음을 바로 할것을 바라는 마음이 배어있는 곳이 강녕전(康寧殿)이라 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궁궐 전각 하나 하나의 이름은 그냥 쉽게 지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왕조국가의 상징적 공간인 궁궐의 이름에는 조선시대의 사상과 이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성리학을 이념으로 했던 조선왕조는 유교 경전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권력은 백성으로 부터 나온다는 민본국가임을 천명하였고

그래서 조선의 꿈과 이상을 고스란히 건물 이름에 새겨둔 것이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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