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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한국사ㆍ세계사ㆍ토막상식

중국의 4대 악녀

by 모모파크 2023.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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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은의 달기  

[주지육림]의 주인공 달기

주 왕과 달기: 중국에는 4대 악녀와 4대 미녀가 있다고 하는데 ‘달기’는 그 4대 악녀 중 한 사람이다.

‘달기’에 관한 기본 사료로서는 《사기 은본기》를 들 수 있는데,

그 기록에 따르면 ‘달기’는 은 왕조 말기(BC 11세기경)에 ‘주(紂)’왕의 총애를 받았다.

‘주’왕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악사 ‘사연(師涓)’을 시켜서 음탕한 음악인 북도지무(北鄙之舞)와 미미지악(靡靡之樂)을 만들게 했다.

 

술을 채운 연못에 고기를 걸어 둔 숲[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어서 나체의 남녀들로 하여금

서로 뒤쫓게 하는 등 날마다 음탕한 생활을 했다.

 

《열녀전(列女傳) 잉첩전(孽嬖傳)》의 은주달기(殷紂妲己) 조에는

‘달기’는 포락(炮烙)이라는 형벌을 즐겼다고 하는데, 이 형벌은 구리 기둥에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고,

죄인으로 하여금 그 위를 맨발로 걸어가게 하여 발이 미끄러져 불속으로 떨어지면 그대로 타 죽게 하는 것으로,

‘달기’는 사람이 산 채로 불에 타 죽는 모습을 보고 박장대소하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재상 비간(比干)이 “선왕(先王)의 전법(典法)을 따르지 않고 아녀자의 말만 따르시니 재앙이 올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라고 간언하자, ‘달기’가 ‘주’왕에게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주’왕을 부추겨 ‘비간’의 심장을 도려내서 감상했다고 한다.

 

 

  2. 한의 여태후  

여태후(呂太后): 고 황후 여씨(高皇后 呂氏 ?–BC180)는 한고조의 황후이며

한나라 제2대 황제인 혜제의 어머니이다.

이름은 ‘치(雉)’, 자는 ‘아후(娥姁)’, 시호는 고 황후(高皇后)였지만, 나중에 광무제가 이 시호를 박탈했다.

 

현 산동성 ‘단부’의 유력자인 ‘여공’의 딸로 태어나 당시 ‘패’현 ‘사수’의 정장이었던 ‘유방’에게 시집 가고,

그 여동생인 ‘여수(呂須)’는 ‘번쾌(樊噲)’에게 시집 갔다.

고조 ‘유방’과의 사이에서 일남일녀(혜제와 노원공주)를 두었다.

한고조가 죽고,

혜제 ‘유영’이 즉위하면서 ‘여치’는 황태후로서 그 후견을 맡았지만,

고조의 후계자를 둘러싼 다툼은 뿌리 깊어서 혜제가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치’는 초왕 ‘유여의’를 독살하고, 그의 모친인 ‘척’부인의 손과 다리를 자르고 눈을 도려 내었으며,

약을 써서 귀를 멀게 하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목청을 도려내고서, 변소에 가두어 ‘인간 돼지’라고 부르게 했다고《사기》는 적고 있다.

 

 

참고로...

초한지의 여치는 유방의 부인입니다 !

 

유방은 비빈으로 척부인을 뒀었는데 유방이 여치보다 척부인을 더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방이 죽고 나서는 여치의 악랄함이 극에 달았다고 하며...

 

척부인의 아들인 유여의와 여태후의 아들 혜제는 사이가 좋았었나봅니다

여태후는 유여의를 죽이고, 분노한 척부인이 여태후에게 항의하자 독약을먹여 벙어리로 만들고,

귀에 유황을 넣어 귀를 멀게하고, 앞을못보게하고 코를 뒤집고, 팔다리를 잘라 돼지 우리에서

생활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일명 인간돼지라는게 실존했다고 할만큼이었다니 너무 끔찍하지 일화입니다!

 

효제에게

여태후 : "돼지우리에 신기한 짐승이 있습니다. 함께 보러가지요"

혜제 : "어머니 저것이 무엇이옵니까?"

여태후 : "인간돼지입니다. 감히 황제를 유혹해 어미를 업신여긴 몹쓸 동물이었죠!!

 

이 일에 충격을 받은 혜제가 얼마 되지 않아 죽자,

‘여치’는 혜제의 아들인 ‘공’[소제]을 황제로 옹립하고 태황태후가 되었다.

여씨 일족과 건국공신들의 협력을 받아 정치적 안정을 꾀했지만,

이때부터 각지에 제후로 봉해져 있던 ‘유방’의 서자들을 차례로 살해하고 그 후임에 여씨 일족을 봉했으며,

자신에게 반항하는 소제 ‘공’을 살해하고 상산왕 ‘홍’[소제]을 옹립한 탓에 공신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우려한 여태후는 더욱더 여씨 일족을 중앙의 요직에 기용하고서 죽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진평’과 ‘주발’을 위시한 공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태위 ‘주발’은 즉시 군문으로 들어가 장병들에게 영을 내렸다.

“여씨를 편드는 자는 오른쪽 어깨를 벗고, 유씨를 편드는 자는 왼쪽 어깨를 벗어라!

” 여씨 일족을 모두 죽이고 유방의 5남인 대왕 ‘유항’[문제]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다.

 

이때 ‘홍’[소제]도 혜제의 친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살해당했으며,

여동생이자 ‘번쾌’의 아내인 ‘여수’도 채찍형으로 살해되었다.

 

  3. 당의 측천무후  

당 태종과 측천무후 :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는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이며,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무주(武周) 왕조의 여황제이다.

 

음탕하고 간악하여 황위를 찬탈한 요녀라는 비난이 있는가 하면,

민생을 보살펴가며 나라를 잘 다스린 여걸이라는 칭송도 있다.

14세에 태종 ‘이세민’의 후궁으로 궁에 들어오지만 12년이 지나도록 태종의 성은을 입지 못하고 지냈다.

이러한 ‘무측천’을 태종의 아들 ‘이치(李治)’가 보고 반해 버린다.

‘이치’는 이후 당 고종이 되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649년 태종이 죽자 황실의 법도에 따라 ‘무측천’은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된다.

고종이 된 ‘이치’가 부왕을 분향하기 위해 ‘감업사’에 갔다가 그녀를 보고 궁궐로 데리고 들어오니

이 때 ‘무’씨의 나이 28세였다.

 

그녀는 황궁에 들어와 고종의 황후 왕씨(王氏)와 후궁 소숙비(蕭淑妃)의 사랑 다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고종 ‘이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무’씨가 둘째 아이로 공주를 낳았다.

자녀가 없었던 황후 왕씨는 자주 ‘무’씨를 찾아와서 공주를 데리고 놀기를 좋아했다.

‘무’씨는 자기의 어린 딸을 목 졸라 죽여 이불로 덮어두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종을 맞이했다.

죽어 있는 딸을 보게 된 고종을 향하여 무씨는

대성통곡을 하면서 조금 전에 왔다 간 사람은 황후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이에 고종은 654년 겨울, 황후 왕씨와 ‘소숙비’를 폐서인 하였고,

이로부터 6일 뒤에 ‘무’씨를 공식 황후로 맞아들인다.

‘무’씨는 서인이 된 황후 왕씨와 ‘소숙비’를 각각 두 다리를 잘라서 산채로 술 항아리 속에 넣어두고

고통 속에 죽어가게 했다.

그녀는 자신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친자식도 그냥 두지 않았다.

이홍(李弘), 이현(李賢), 이현(李顯), 이단(李旦)이라는 4명의 아들과 딸 2명이 있었는데

이미 자기 손으로 딸 하나를 목 졸라 죽인 바 있다.

656년 태자 이충(李忠)이 폐위되자 ‘무씨’의 장남 ‘이홍’을 황태자에 책봉했다.

675년, 그녀는 24살의 아들 태자 이홍(李弘)을 독약을 먹여서 죽여 버린다.

 

‘이홍’이 죽은 한 달 후에 둘째 아들 ‘이현(李賢)’을 태자에 책봉하지만,

여색을 탐한다는 죄목으로 그 마저 폐태자 하여 멀리 파주(巴州)로 추방해 버린다.

 

그 이틀 후 셋째 아들 이현(李顯)을 태자에 책봉한다. 683년,

고종이 죽자 태자 이현(李顯)이 황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중종(中宗)이다.

684년 중종도 결국 ‘무’씨의 노여움을 사 폐위 당하여 여릉왕(廬陵王)으로 강등되고 궁궐 깊숙이 유폐되었다.

중종을 유폐한 사흘 뒤에 ‘무’씨는 ‘파주’로 사람을 보내어 이현(李賢)을 죽여버린다.

 

중종을 유폐시킨 ‘무’씨는 이번에는 막내아들 이단(李旦)을 예종(睿宗) 황제로 옹립한다.

이때부터 그녀는 황제의 정사 참여를 배제하고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여 모든 대소사를 직접 관장했다.

 

684년 9월, ‘무’씨에 의해 경성에서 추방되었던 서경업(徐敬業)이 반기를 들었다.

서경업은 양주(揚州)에서 군대를 일으켜 10여일 만에 10만 대군을 결성했다.

이때 유명한 시인으로 초당사걸(初唐四杰) 중의 한 사람인 낙빈왕(駱賓王)이 ‘무’씨를 토벌하기 위한 격문을

썼는데, ‘무’씨는 그 격문을 보고 화를 내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의 휘하에는 그러한 인재가 없음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무’씨는 이효일(李孝逸)에게 30만 대군을 주어 서경업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하였고,

난은 40여일 만에 평정되었다. 서경업과 낙빈왕은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690년 9월 9일 중양절을 기해, 무씨는 예종 ‘이단’을 황제에서 폐하고 자신이 황제에 올랐다.

자신을 측천 금륜대성신황제(則天 金輪大聖神皇帝)라 칭했고 국호를 대주(大周)라 하였으며

도읍을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했다.

 

역사에서는 그녀가 세운 주(周)나라를 서주(西周), 동주(東周)와 구분하기 위하여

그녀의 성인 무(武)씨를 따 '무주(武周)'라고 불렀다. ‘무’씨는 황제에 오르자

당왕조의 종친과 구대신들을 몰살시켰으며 국법을 더욱 엄히 다스렸다.

 

그녀는 당시 아직도 미흡하였던 과거제도를 개편, 실력 있는 신흥 세력들을 중용하여

그들을 지지기반으로 함과 동시에 많은 인재들을 양성, 적재적소에 등용했다.

그녀가 다스리던 시기는 태종 이세민이 다스리던 시대에 버금갔고, 백성들의 생활은 풍족했다.

 

 

‘무’씨는 또한 불교를 중흥 시켜, 전국에 많은 불교 사원을 세우고 승려들을 양성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러한 그녀의 치세를 ‘무주의 치(武周之治)’라 불렀다.

 

만년에 이르러 ‘무’씨는 조카 ‘무승사’에게 황위를 물려줄지,

아니면 당 왕조의 황태후로 다시 돌아갈지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는데

‘무’씨 왕조를 잇는 것에 대해 여러 신료들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699년,

‘무’씨는 유폐되어 있던 여릉왕 ‘이현’을 다시 태자에 봉했다.

 

6년 뒤인 705년, ‘장간지’가 군사들을 이끌고 ‘무’씨가 와병 중인 전각으로 가 당왕조의 복원을 요청하였고,

무씨는 이를 승낙하여 당왕조는 15년 만에 복권되었다. 그리고 중종 이현이 다시 황제에 즉위했다.

 

무씨는 최초의 여성 태상황이 되었다.

그 해 11월, ‘무’씨는 죽은 뒤에 황제가 아닌 황후로 칭하라는 유언과 함께 자신의 묘비에는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고 말하면서 82세로 죽었다.

 

 

 

중국의 4대 미녀

중국의 4대 미녀하면, 서시,왕소군,초선,양귀비를 일컫습니다. 오늘은 중국의 4대 미녀 이야기를 간단하게 해보겠습니다. 침어낙안(沈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 沈魚落雁 물고기는 물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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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씨는 본래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이를 대신하여 무주(武周)를 세웠기 때문에 역적으로서 태묘(太廟)에서

제사 지낼 수 없었으나, 그녀의 두 아들이 모두 황위에 오른 이후 예종의 후손들이 황위를 계속 물려받았기

때문에 무주(武周)의 황제가 아닌 당나라의 황후로서 태묘에 봉인되어 제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측천무후는 생전에 많은 남첩을 두어 질탕한 정사를 즐겼는데 그녀의 눈에 들어 하룻밤 봉사를 한 남자는

이튿날 아침이면 죽어서 대궐을 나갔다고 한다.

 

그가 죽어 무덤을 쓸 때도 산 꼭대기를 파 시신을 묻고 이 장사에 노역한 일꾼들은 모두 죽여버렸다고 한다.

결국 큰 산 하나 전체가 그의 무덤이 되었는데 현재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 측천무후는 황후가 되기전에, 황후를 내리기위해 자신의 딸까지 죽이고,

자신의 명을 거스리는 후궁들은 수족을 잘라 골수까지 무르도록 찌라고 명했으며,

 

황후가 된 후에는 자신이 왕이되기 위해 아들을 죽이고,

66세에 자신을 측천황후라 부르며 3천미남을 후궁으로 들였다고 합니다

3천 궁녀도 아니고 3천 미남을...

하지만 측천무후의 업적은 대단했다는 평을 받으며 명성은 꺾을수가 없다고 합니다.

 

 

  4. 청의 서태후  

서태후(西太后 1835-1908): 청나라 말기 ‘함풍제’의 세 번째 황후이다.

‘동치제’의 생모이자 ‘광서제’의 이모로서 48년에 걸쳐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건립한 나라였고, 만주족은 8기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상3기, 하5기로 나눈다.

서태후의 가정은 상3기에 속했다. 귀족 집안이었다.

 

17살에 황궁에 들어간 서태후는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일년 동안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내시들에게 부탁하여 황제가 산책할 무렵, 준비하고 있던 노래를 불렀다.

황제는 이때부터 서태후를 알게 되었고 왕자를 출산했다.

 

1860년 영국군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함풍제는 열하로 도피해 있었는데 이 때 병들어 죽고 말았다.

함풍제가 죽자 그의 유일한 아들인, 서태후가 낳은, 동치제가 즉위하면서 서태후는 황태후가 되었고,

서쪽채에 살았기에 서태후, 황제의 정실 황태후는 동쪽채에 살았다 하여 동태후라 했다.

당시 동치제의 나이는 겨우 6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두 태후가 수렴청정하기 시작하였는데,

두 사람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서태후는 야심가였고 동태후는 정치에 흥미가 없었다.

 

인자하고 사리에 밝은 동태후 때문에 서태후는 대신들한테서도 환심을 살수가 없었다.

이때 부터 서태후는 동태후를 미워하게 되었고, 동치제가 17살이 되자 결혼하여 두 태후의 수렴청정을

끝내기로 결정했지만, ‘동치제’도 생모인 서태후의 성격을 닮아서인지 폭주가인데다 성격도 날카로 왔다.

 

그 후 생모인 서태후는 항상 정치에만 관심을 가지고 무슨 일이나 보고 받기를 원했고

아들의 주관대로 결정을 못하게 하다보니 충돌이 잦았다.

동치제는 차츰 생모인 서태후를 멀리하고 동태후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황후를 택할 때도 동치제는 양모인 동태후가 좋아하는 여인을 황후로 맞았고,

이런 일들로 인하여 서태후는 동태후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서태후의 됨됨이를 잘 알고 있었던 함풍제는,

서태후가 자기아들이 황제가 되었다 하여 동태후를 무시하면,

서태후를 죽여 버리라는 밀서를 남겼는데, 서태후는 이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마침 동태후가 감기로 앓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동태후의 병이 나은 후 서태후는 동태후를 보러 갔는데

동태후는 서태후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고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서태후는 눈물을 흘리면서 “언니가 몸 져 눕자 너무 안타까워 점을 쳤더니

그가 하는 말이 중약에 사람 피를 타서 먹으면 곧 나아질 거라고 해서,

내 피를 중약에 넣어드렸더니 과연 언니의 병이 나아졌다.”고 말했다.

 

원래부터 마음이 약한 동태후는,

이 말에 감동되어 함풍제가 준 밀서를 꺼내어 불에 태워 버렸다.

그후부터 서태후의 태도는 180도로 바뀌었는데,

동태후는 그 일을 후회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한번은 서태후가 몸 져 누웠다.

동태후는 서태후를 보러 몇 번 다녀왔는데 서태후의 태도가 웬 일인지 친절 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몸져누운 서태후가 동태후에게 전병을 보내왔는데 동태후는

그 전병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던 것이다.

또한 서태후는 그의 아들 동치제가 황후를 택할 때 자기 의도대로 하지 않았다 하여,

황제와 황후의 접촉을 자주 못하게 하는 등 동치제의 황후를 핍박했다.

 

이에 실망한 동치제는 밤이면 변복을 하고 몰래 기생집을 드나들기 시작했는데, 

그 얼마 후 병(天花)들어 죽고 말았다.

 

 

아들이 죽자 서태후는 자기가 계속 수렴청정하기 위하여 남편을 핍박해 죽였다는 죄명으로

동치제의 황후를 죽인다. 그리고 또 3살밖에 안되는 광서제를 자리에 올려놓고 수렴청정을 계속했다.

광서제는 서태후의 여동생과 서태후의 시동생이 낳은 아들이다.

 

후에 광서제가 19살이되자 서태후와 정치적 충돌이 잦은 가운데,

서태후는 보수파의 대표로서 실권을 장악했다.

 

광서제는 유심파인 강유희, 양계초, 담사동 등의 지지 하에 실권을 잡고자 했다.

이리하여 1898년 “유심변법”을 실시하였는데 이를 “무술변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변법은 103일만에 서태후에 의해 진압되었고 담사동 등 개혁파는 살해되었으며 강유희, 양계초 등은

외국으로 망명하였고 광서제는 가택연금 상태가 되었다.

 

광서제가 갇혀 있던 곳은 여름에는 이화원의 옥판당이었고 겨울에는 중남해의 영대였다.

광서제는 10년간 갇혀 있었으며 1908년 서태후가 죽기 하루전에 서태후에 의해 살해되었다.

서태후는 상상을 넘는 사치스런 생활을 하였는데,

예를 들면 한 테이블은 먹는 식탁이고 다른 한 테이블은 상상만 하는 식탁이었고 한다.

서태후의 한끼 식사는 주식이 60가지, 점심이 30가지, 각종 산해진미가 128가지였다고 한다.

 

서태후의 하루 식사비는 백은으로 3kg 정도 들었는데,

그 당시 이 돈은 5000kg의 쌀을 살 수 있었으며, 만명의 농민이 하루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옷만 해도 3000여 상자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 입는 사치꾼이었고,

자신의 존엄을 위하여 줄곧 이화원에 전화를 설치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서태후의 말에 의하면 전화하는 사람이 무릎을 꿇고 전화하는지 앉아서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궁녀, 내시, 대신들은 서태후를 무척 무서워 했는데,

광서제의 아버지는 광서제를 황제로 올려놓는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기는 커녕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시들이 서태후의 머리를 빗겨 주는데 머리카락 하나만 떨어져도 목을 치겠다는 말에,

한 내시는 머리를 빗을 때면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빗었는데,

서태후의 빠진 머리카락이 모두 소매 안으로 떨어지게 했기 때문에,

서태후는 머리가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한번은 한 늙은 내시가 실수를 범했다 해서 인분을 억지로 먹였다고 한다.

 

서태후는 매일 저녁 산모의 젖을 먹었는데,

두 사람의 산모는 목욕을 한 후 몸에 붉은 천을 감고 유두만 내놓은 채

몸을 다 감싼 후 서태후가 침대에 누우면 무릎을 꿇고 젖을 먹도록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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